[인터뷰] '대립군' 여진구, 얼굴에 담긴 드라마
2017-06-01 18:19
그의 강점은 지난달 31일 개봉한 영화 ‘대립군’(감독 정윤철)에서도 발휘된다. 임진왜란 당시 ‘파천’(播遷)한 아버지 선조를 대신해 왕세자로 책봉되어 ‘분조’(分朝)를 이끌게 된 ‘광해’와 생계를 위해 남의 군역을 대신 치르던 ‘대립군’(代立軍)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속, 여진구는 광해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저는 사극 경험이 많은 편이에요.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왕의 모습이 어울리지 않길 바랐어요. 왕이라는 지위, 용 문양과 어울리지 않은 모습. 즉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은 소년 같은 모습이 느껴지길 바랐죠. 기존 사극 톤을 버리고 전작과 달리 새로 시작한 느낌으로 연기했어요.”
여진구의 말처럼 ‘대립군’ 속 광해는 미성숙한 소년이다. 서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아비 선조의 관심을 받지 못한 그는 준비도 채 하지 못하고 허수아비 왕으로 덜컥 분조를 맡게 된다. 나라를 버리고 명나라로 피란을 가버린 선조를 대신해 의병을 모으러 떠난 어린 광해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대립군의 진심을 확인, 점차 성장해나간다.
불완전한 광해는 배우 여진구에게도 의심과 불안을 안겼다. 하지만 정윤철 감독의 세계관과 디렉션은 확고했다. 그는 흔들리지 않았고 확신에 차 여진구에게 디렉션을 전했다.
“감독님과 선배님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광해를 완성할 수 없었을 거예요. 기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건 참 좋은 거더라고요. 하하하. 안심도 되고…. 현장에서 흔들릴 때마다 감독님을 찾아갔고 중심을 잡아주셨어요.”
“몸도 힘들고 마음도 힘드니까…. 오히려 연기에는 도움이 된 것 같아요. 하하하. 고통스러운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고 할까요? 오히려 신경 써서 연기하는 게 더 이상하게 보일 것 같더라고요. 현장에서 오는 감각들을 그대로 살리려고 했죠.”
고된 산행으로 “오히려 건강해진 느낌을 받았다”며 해맑게 웃는 얼굴은 영락없는 또래 남자아이다. 그동안 사극을 찍을 땐 “한복이 망가질까 봐 전전긍긍”했다며, 이번 작품에서는 “주름이 져도 되고 찢어져도 되니 편하게 마음껏 널브러져(?) 있었다”며 농담한다.
“특히 왕세자 복장은 비단이라서 주름이 잘 잡히거든요. 그래서 쉴 때는 차라리 옷을 벗고 있는 게 편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옷이 해져야 하니까. 하하하. 나중에는 땅바닥에도 막 앉고 신경 쓰지도 않았어요.”
광해의 얼굴을 지운 여진구의 모습은 또래 남자아이들처럼 밝았다. 이정재와 호흡을 맞추게 된 소감, 무서운(?) 대립군의 첫인상 등을 꺼내는 모습을 보니 그제야 여진구의 나이가 실감 났다.
“이정재 형이 ‘대립군’을 한다는 소식에 놀랐어요. 심장이 막 떨리더라고요. 기대도 많이 되고. 시나리오 속 토우를 어떻게 그릴지도 궁금했어요. 같은 남자지만 가슴 떨려서…. 하하하. 제작보고회 때 ‘아저씨’라고 말한 건, 토우에 대한 거였어요! 정재 형이 속상해하시던데. 오해라고 꼭 전해주세요. 첫 촬영에 대립군과 만나는 신을 찍었는데 선배님들이 다 나선 얼굴, 낯선 눈빛으로 절 보니까 무서웠었거든요. 이미 다 대립군에 완전히 빙의해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아저씨 같다’고 말한 거였어요.”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여진구지만 연기 경력은 여느 중견 배우 못지않다. 어느덧 12년 차가 된 여진구는 “중학교 시절 연기가 가장 좋았다”며, 연기에 대한 심도 깊은 고민을 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대립군’을 찍기 전 제가 출연한 작품들을 돌려 봤어요. 어느 순간부터 연기에 대한 강박, 압박을 느끼게 됐거든요. ‘잘 해야 한다’는 생각과 욕심이 드니까 늘 머물러 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어떤 막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그걸 깨고 싶었던 것 같아요.”
드라마 ‘타자’ 속 연기가 가장 마음에 든다는 여진구. 그는 “연기에 관한 순수한 마음과 열정”이 그리운 듯했다. 하지만 여진구는 과거의 영광에 갇힐 마음이 없었다. “돌아가고 싶지만 퇴보할 순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어릴 땐 그냥 연기가 좋고 재밌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중요한 역을 많이 맡았는데 부담감이 없었어요. 그냥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연기했었죠. 하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조금씩 부담을 느끼게 됐어요. 작품 속에서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나 설명하고 싶은 감정이 생기면서 생각이 많아진 것 같아요. 다들 칭찬해주셨지만 저는 제 연기를 보면서 꽉 막힌 기분을 느꼈어요. 너무 힘이 들어가서 그런가? 한참 고민하다가 초·중학교 때 연기를 봤는데 정말 깜짝 놀랐어요. 순수하게 연기를 좋아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러니까 더 편하게 (작품에) 몰입한 것 같고. 한동안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그런 마음을 숨기고 편하게 다가가고자 했어요.”
그런 이유로 여진구는 이번 작품에 대한 기대와 궁금증이 크다. 아쉬움도, 갑갑한 마음도 느끼지만 “처음으로 결이 다른 연기를 시도하게 된 것”에 대한 피드백을 얻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연기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어요. 그래서 이번 작품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이 너무 궁금해요. 다음에는 20대 초반의 제 모습, 지금 나잇대에 할 수 있는 청춘의 모습이 담긴 작품을 하고 싶어요.”
청춘물에 대한 갈망을 느낀다는 여진구의 차기작은 장준환 감독의 ‘1987’이다. 1987년 민주화 항쟁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둘러싸고 진실을 은폐하려는 세력과 목숨을 걸고 진실을 알리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1987’에서 박종철 열사 역을 맡게 되었어요. 너무 감사하게도 장준환 감독님이 먼저 찾아주셨어요. 감독님이 함께 하자고 하니까 당연히 출연하게 되었는데 박종철 열사님을 연기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감독님께서 ‘당시 박종철 열사가 너와 나이가 같으니 편하게 드는 감정을 표현하라’고 하셨어요. 무섭고 두려운 마음을 잘하려고 하지 말고 편하게 연기하라고요. 그 작품 역시 기대가 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