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칼럼] 신사임당과 꽃, 그리고 생활문화
2017-03-23 15:56
또 신사임당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풀과 벌레’ 그림도 주목을 받고 있다. 원예학자 입장에서 살펴봐도 꽃과 곤충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놀라운 수준이다.
석죽과 패랭이꽃의 줄기에 마주 난 긴 작은 잎이며, 백합과의 원추리는 세 개의 꽃잎과 꽃받침 잎이 둥글게 배열된 모습이 마치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 같다.
맨드라미의 닭 벼슬 같은 꽃차례, 과꽃 잎의 앞쪽 듬성듬성 갈라진 잎도 정확하게 묘사됐다.
아마도 신사임당은 상당한 수준의 가드너였으리라. 집에서 정원을 가꾸면서 일상 속에서 꽃과 잎을 늘 관찰하지 않았다면 이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한 식물 정밀화(Botanical art)를 그리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 율곡 이이의 범국(泛菊)이나 영국(詠菊)이란 시에서 국화잎을 술에 띄워 정취를 느끼고, 가랑비 오는 날 국화를 심으면서 쓴 종국(種菊)이란 시가 전해지는 것을 보면 그의 꽃 사랑은 상당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사랑은 어머니에게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 시절 꽃을 가까이했던 사람들은 이들 모자만이 아니다. 16세기 조선에서 꽃 기르기는 정신수양 혹은 취미생활로 일상 속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
이들과 비슷한 시기에 살면서 성리학의 정립에 기여한 회재 이언적은 꽃을 심는다는 것(種花)을 대자연의 이치를 더듬는(探造化) 것이라고 했다.
성리학의 거두 퇴계 이황도 꽃을 가까이했는데, 특히 그는 매화를 매우 좋아했다. 그가 쓴 시에는 매화 화분을 의인화해 얘기를 나누는 것이 있다.
또 다른 시에서는 자신의 겨울철 소일거리가 꽃이나 대나무 화분의 실내 겨울나기를 돌보는 일(藏花護竹)이라고 적고 있다.
오늘날 아파트 속에서 사느라 참으로 빈약해진 지금의 꽃 기르기 문화에 비한다면, 고전 속 조선시대 꽃 기르기 문화는 매우 풍성했음을 알 수 있다.
흔히 주변에서 ‘꽃은 귀찮고 쓸모가 없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꽃 선물도 귀찮은 애물단지가 되기 십상이다.
집에서 꽃을 기르는 것은 한가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로 취급되고, 주말농장에 상추나 고추를 심지 꽃은 왜 심느냐는 소리도 들린다.
이런 생활 속 꽃에 대한 인식과 함께 경기침체 등의 영향으로 꽃 소비가 부진해지며 화훼 업계가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김영란법(부정청탁금지법) 시행 이후 꽃바구니, 축하난, 근조·축하화환 등의 수요가 줄면서 화훼 도·소매 매출이 급감하고 있다.
실제 aT(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운영하는 화훼공판장의 경우, 도매 거래액이 이전에 비해 6% 감소됐다. 특히 난의 경우 30% 감소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옛 선조들처럼 생활 속에서 꽃을 즐기는 문화를 향상시키는 것이다.
200년 전 다산 정약용은 ‘경제적인 쓸모’에만 치중하게 된 후세의 우리를 염려해 그랬는지 당부의 글을 우리에게 남겨 놓았다.
"몸과 정신이 묘하게 합쳐져서 사람이 됩니다. 굳이 몸만 기른다면 정신이 굶주리게 되지요. 열매가 있는 것은 입과 몸을 길러주고, 열매가 없는 것은 마음과 뜻을 즐겁게 해줍니다. 어느 것 하나 사람을 길러주지 않음이 없지요."
신사임당의 ‘풀과 벌레’ 그림 속 활짝 핀 패랭이꽃, 원추리를 보며 자연과 하나가 돼 아름다운 마음을 길렀던 선조들의 삶을 오늘에 되살리면 어떨까?
아파트 베란다 한편에 화단을 만들고, 향기로운 꽃으로 집과 사무실을 꾸미면서 꽃 한 다발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문화가 다시금 우리 생활 속에서 활짝 피어났으면 한다. 이를 통해 우리의 마음뿐 아니라 실의에 빠진 꽃 재배 농가에도 희망을 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