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 365]'기업가의 건의는 필요없다'는 한국
2017-03-12 16:14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로 한국사회가 절망에 빠졌던 1997년 말, 병마와 싸움을 벌이고 있던 최종현 SK그룹 회장이 쓴 ‘21세기 일등국가가 되는 길’의 한 대목이다.
생의 마지막 시기 “이제 나의 가정이나 회사는 그 나름대로 성장할 수 있는 궤도에 올려놓았다. 이제 여생은 국가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보람된 일을 찾아 해야 되겠다”고 자주 말했던 그는 1992년 대통령 선거 당시 새로 탄생할 정부의 정책 방향을 제시한 ‘경제계가 바라보는 국가경영’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해 각 정당을 포함한 주요 정책기관에 제출했다.
1993년 2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으로 선임된 이후에는 IMF 사태 도래를 예고하고 국가경제력강화민간위원회를 설치해 우리 경제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고비용저효율 구조를 타파하자고 역설했고, IMF 사태 발발 직전인 김영상 정부 말기에는 경제회생을 위해 국가긴급조치와 같은 특단의 조치라도 취해줄 것을 서슴지 않고 건의했다.
거듭된 건의는 번번이 묵살되었다. 그러나 최 회장은 죽음 직전까지 국가의 미래를 고민했고, 그 결과물이 ‘21세기 일등국가가 되는 길’이었다.
최 회장은 한국이 21세기 일등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국가존립을 위한 최우선 과제를 ‘국가안보’에서 ‘경제발전’으로 바꿔야 한다고 역설했다. 21세기의 새로운 Nationalism(국수주의)은 20세기에 이어 자유민주주의라는 기본틀을 유지하되, 국민의 자유와 권한을 최대한으로 보호하면서 우선 경제적으로 잘사는 사회를 건설에 나가는데 기본목표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두 가지 핵심과제를 반드시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첫째는 작은 정부의 추구, 둘째는 선진국의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의 해소였다.
‘작은 정부’는 정치권과 중앙·지방정부를 포함한 광의의 개념으로, 민간기업의 효율성을 최대한 활용해 정부 조직과 국회의원수를 최소화하자는 것이다. 경제성장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으로 지목한 것은 사회보장제도, 세제, 정부규제, 노사관계, 교육 등 빈부격차 해소를 위해 분배에 무게를 두고 추진했으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비효율을 초래한 경제분야 제도였다.
최 회장은 두 가지 과제를 제시했지만 해결은 쉽지 않을 것임을 예견했다. 그 본질이 제도나 기구 또는 주의·사상의 문제가 아닌 사람의 문제이기 때문에 까다롭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우수한 국정수행능력을 가진 대통령, 표심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있는 의정활동을 할 수 있는 정치인, 국가 업무를 충실히 추진할 수 있는 정부 관료를 선발할 수 있는 엄정하고 객관적인 제도적 틀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회장의 글을 완성한지 30년이 지났다. 하지만 지금 한국은 그가 그렸던 21세기형 일등국가에 아직 올라서지 못했다. ‘경제발전’은 ‘경제권력 타파’라는 구호에 밀려 힘을 잃었다. IMF 사태 때도 기업은 국가를 망하게 한 주범으로 낙인 찍혔지만 그나마 최 회장과 같은 경제계 원로들의 건의는 국민들로부터 용인 받았다. 하지만 2016년 하반기부터 지금까지 기업들에게는 계엄령 또는 함구령이 내려져 몸을 바짝 수그리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사태 개입 의혹 때문에 국민들은 기업인의 말은 거부하고, 상식적 수준의 검토도 없이 비판한다. 아예 말을 말라는 것이다.
국가경제는 경제인들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정치, 사회 전반의 제도개선이 불가피한데, 여전히 한국사회는 정치논리에 의해 경제논리가 왜곡되는 풍토가 바뀌지 않고 있다. 기업인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최 회장과 같은 기업인들이 필요없다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는 지금, 한국은 진짜 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