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남피살] 김정남의 성장 배경과 자질, 영향력 평가

2017-02-15 10:22

비운의 北황태자 김정남...김정남이 지난 2010년 6월4일 마카오에서 한국 기자들과 인터뷰한 후 손을 흔드는 모습.
[연합뉴스]


김정남의 생모인 성혜림은 김정일과 동거를 시작하기 전, 1920년대 카프 작가로서 소설 『땅』과 『두만강』 등으로 유명한 월북작가 이기영(당시 조소문화협회 위원장 및 작가동맹위원장)의 맏아들 이평과 19살에 결혼하여 딸까지 둔 여성이었다.

성혜림은 연극영화대학에서 연출과를 전공하였으며, 졸업반에서 예술영화 ‘분계선 마을에서’의 주인공으로 뽑혔다. 당시 김일성 수상이 이 영화를 높이 평가하였고 북한에서 처음으로 ‘인민상’을 수여하면서부터 성혜림은 조선예술영화촬영소의 주인공 배우로, 북한 인민들이 다 아는 유명배우가 되었다. 김정일이 그 같은 성혜림에게 반하여 그녀를 강제 이혼시킨 후 1970년부터 ‘극비로’ 동거하게 되었고, 그들 사이에서 1971년 5월 10일 김정남이 태어났다.

성혜림의 언니인 성혜랑은 김정일이 김정남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정도다”라고 회상했다. 그러나 당시 북한에는 유교적·보수적 문화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은 다른 남성과 결혼한 경력이 있고 김정일보다 다섯 살 연상인 성혜림을 북한 최대 명문가의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성혜랑의 아들이며 김정일의 처조카인 이한영(본명 이일남)은 김정남이 두세 살 정도 되었을 때,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가 성혜림에게 “언니는 우리 오빠보다 나이도 많고 한 번 결혼해서 애도 딸린 여자니까, 정남이는 내가 키울 테니 나가시오. 노후는 잘 보장해 주겠소.”라고 폭탄선언을 했다고 증언했다. 그래서 성혜림은 그 때부터 김정남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신경성 질환과 불안으로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1981년 8월 평양에서 촬영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장남 김정남이 함께 찍은 사진. [여성중앙 제공=연합뉴스] 
 

김일성은 1974년에 김정일에게 김영숙이라는 여성과 결혼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성혜림은 아들 김정남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김정일에게 결혼할 것을 권고하였다. ‘효자’인 김정일은 아버지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고 김영숙과 결혼하였지만, 대체로 형식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김영숙과는 설송이라는 딸만 두었다.

어쨌든 김정일이 김영숙과 결혼한 후 성혜림은 불면증, 신경쇠약증, 불안발작 등의 병을 얻어 치료를 위해 모스크바로 떠나게 되었다. 성혜림이 모스크바로 떠난 후 김정남을 맡아 키운 것은 성혜림의 어머니 김원주와 언니 성혜랑이었고, 김정남은 “울타리 바깥세상과 철저히 격리된 상태에서 단 한 명의 친구도 없이 어울려 뛰어 노는 즐거움을 모르고 기형적으로” 키워졌다.

국내 언론은 2000년 말 성혜랑의 자서전 『등나무집』이 서울에서 출간되기 전만 해도 성혜림에 대해 ‘동거녀’, ‘두 번째 부인’, ‘전처’ 또는 ‘첩’ 등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다가 성혜랑의 자서전 출간 이후에는 성혜림에 대해 대체로 ‘부인’, ‘전처’, ‘전부인’, ‘첫째 부인’ 또는 ‘본처’ 등으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정작 성혜랑은 김정일이 후계자 자리를 지키기 위해 부친이 숨진 1994년까지 성혜림과의 관계나 아들이 있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어 성혜림이 북한 내에서 결코 김정일의 정식 ‘부인’으로 인정받은 적이 없음을 밝히고 있다.

이한영은 김정남이 5살 때 김정일이 처음으로 김일성에게 김정남의 존재에 대해 알리고 “조용히 김일성에게 데려간 것으로 알고 있다”고 수기에서 적고 있는데, 이 같은 언급은 성혜랑의 증언과 배치된다. 이한영은 더 나아가 김일성이 당황해하면서도 “하나밖에 없는 귀여운 손자가 태어난 것”에 대해 매우 기뻐했으며, “김일성이 정남이를 찾을 경우 부관과 같이 가는 것을 나도 본 적이 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1979년 김정일이 김정남을 자신의 집무실로 데리고 가 대회의실 중앙의 자리에 앉게 하고 “정남아, 네가 커서 이다음에 큰소리 칠 자리다”라고 말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한영의 이 같은 증언은 현재 김정남이 김정일의 ‘장남’이기 때문에 후계자로 지명될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하는 논자들의 주요 근거가 되고 있다.

여러 증언들을 종합해보면, 고용희에게서 김정철과 김정은이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한영의 주장처럼 김정일은 김정남을 후계자로 키우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혜랑은 1989년경에 “정일 비서가 이미 집에서 떠났고, 그토록 사랑하던 정남이마저 버리고 마는 단계에” 이르렀으며, 김정일이 김정남에 대한 ‘눈물의 애정’을 김정철을 비롯한 새 아이들에게 옮겼다고 밝히고 있다.

결국 북한의 상황에서 김정남은 통상적인 의미의 ‘장남’이 아니라 왕조시대의 ‘서장자(庶長子)’에, 김정은은 ‘적자(嫡子)’에 비유될 수 있다. 과거 왕조시대의 역사에서 서장자는 적자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왕의 사랑을 받으나, 적자가 태어나면 지위가 위태로워졌었다. 유럽으로 망명한 성혜랑은 2000년에 여성중앙21 특별취재팀과 만나 김정남의 후계자설에 대해 “웃기는 소리다. 후계자라는 말을 지금 할 단계도 아니고 내 동생(성혜림)도 원하지 않는다”라고 밝힌 바 있다.

1980년에 김정남이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은 김정일이 그를 국제 감각이 있는 지도자로 키우고자 하는 의도에서 결정된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김정남이 바깥세상과 철저히 격리된 상태에서 단 한명의 친구도 없이 기형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그의 외할머니가 김정남을 정규교육에 넣기 위해 김정일의 반대를 무릅쓰고 겨우 설득해 얻어낸 것이었다.

그러나 김정남은 제네바 체류 1년 반 만에 당시 주 제네바 북한 공사가 남한의 납치 가능성을 집요하게 제기해 모스크바의 프랑스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그 후 1985년 3월 소련공산당 총서기로 선출된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하자 ‘너절한 달러 거지’ 소련보다는 차라리 ‘도덕률이 높은 중립국’ 스위스가 낫다는 판단을 하게 되어 김정남은 다시 제네바 국제학교로 편입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춘기의 김정남이 밤에 바(bar)에 나가기 시작하자 겁을 먹은 성혜림의 어머니가 김정남을 평양으로 데리고 들어감으로써 10대 후반의 나이에 김정남의 유학생활은 끝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김정남이 제네바대학에 진학해서 정치학을 전공했다는 일부 주장은 가능성이 희박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한영이 자서전에서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듯이 김정일은 김정철이 태어나기 전만 해도 김정남을 자신의 후계자로 키우고자 하는 생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용희에게서 김정철과 김정은이 태어난 후 김정남은 서서히 김정일에게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었고, 김정남은 제네바에서 귀국한 후 극도로 통제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성혜랑은 자서전에서 때로는 총에 맞아 사망한 자신의 아들 이한영보다 김정남이 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적고 있다.

고용희에게서 두 아들들이 태어난 후 이미 김정일이 “그토록 사랑하던 정남이마저 버리고 마는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대다수 언론들이 부적절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김정남이 2001년 5월 위조여권을 가지고 일본에 밀입국하려다가 발각되어 추방된 후 후계자의 길에서 멀어졌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한편 김정일이 2001년 1월 중국을 방문하면서 김정남을 데리고 다녔다는 보도를 근거로 김정남이 후계자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김정남에 대한 김정일의 변화된 태도를 고려할 때 그가 김정남을 공식행사에 대동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며, 관계당국의 확인 결과 이 같은 보도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김정남은 불어권 지역인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학교와 모스크바의 프랑스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프랑스어와 영어,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김정남이 프랑스를 자주 방문하는 것은 그가 다닌 국제학교 및 불어 구사 능력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김일성이 1974년에 김정일을 후계자로 결정한 데에는 김정일이 그의 장남이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탁월한 정치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로 작용했다.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 역시 개인적으로는 뛰어난 정치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정남의 이모인 성혜랑은 “정남이는 예민하고 어려서부터 정치적이고 조숙”하며, 또한 “머리가 좋고 판단력이 빠르며, 어머니 성혜림의 예술적인 재능을 이어받아 사람을 잘 웃기는 쾌활한 남자”라고 술회하고 있다.

김정남을 여러 차례 만난 적이 있는 ‘북풍사건’의 주인공 윤홍준도 김정남이 ‘후계자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아주 똑똑하다고 평가하면서, 김정일처럼 말을 아주 빠르게 하고 상대방이 말할 틈을 주지 않는다고 증언했다. 또 윤홍준은 김정남의 말하는 스타일과 걸음걸이가 아버지 김정일을 빼다 박았다고 기억했다. 이렇듯 김정남을 잘 알거나 그와 접촉 경험이 있는 인물들의 증언을 보면 그가 김정일의 성격과 자질을 상당한 정도로 이어 받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김정남은 일정한 자질과 정치적 감각 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정일과는 다르게 북한 내부에서 ‘장남’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정치적 한계를 보이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김정남의 생모인 성혜림이 그의 정치적 후원자가 되지 못한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김정일이 성혜림을 사랑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녀가 2002년 5월 지병으로 사망하기까지 병 치료를 위해 주로 모스크바에 체류함으로써 실제적으로 두 사람이 동거한 기간은 대략 5년 정도 된다.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김정일이 결혼한 김영숙에 대해 성혜랑은 “어느 초대소에서나 볼 수 있는 관리인 정도,” “김비서의 시야밖에 있는 여인”으로 표현하면서 “외부에서 김영숙을 정실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아버지 앞에 합법화된 여자라는 의미 외에는 없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성혜림이 사라진 공백을 메운 여성은 고용희였고, 고용희는 김정일과 1976년경부터 2004년 사망 시까지 거의 28년 가까이 살면서 김일성 사후 ‘국모(國母)’로까지 내세워지게 되었다. 그 결과 김정남은 고용희의 견제에 의해 후계자로 부상할 수 있는 기회를 아예 가지지 못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김정남은 북한에서 김정일의 ‘장남’으로 대우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후계수업’도 받은 적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김정남이 당과 군대에 대한 지도 경험을 쌓아야 진정한 의미에서 ‘후계수업’을 받았다고 할 수 있지만, 고용희 사망 이후에도 김정남이 이 같은 수업을 받았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중국의 김정남 후원설도 근거가 희박하다. 중국으로서는 김정남이 김정일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에게 편의를 제공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김정남의 북한 내 지지기반이 취약한 상황에서 중국이 김정남에 대해 편의를 봐주는 선을 넘어서서 정치적으로까지 후원한다는 무리수를 둔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것이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