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화보] 대장정, 기적의 역사가 남긴 유산
2016-10-27 12:33
인민화보사 부총편집 리샤(李霞) =80년 전, 한 무리의 군인들이 2년 만에 1만2000km를 걸어서 목적지에 다다랐다. 바로 1934년 10월부터 1936년 10월까지 중국공산당이 노농홍군(勞農紅軍)을 이끌고 이동한 대장정이다.
길고 험난했던 여정에서도 중국공산당원과 당 군대는 가슴 속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형용할 수 없는 육체의 고통이 뒤따랐지만 그것마저 견뎌내며 서쪽으로, 다시 북쪽으로 나아갔다. 풀과 나무껍질로 허기를 채우고, 짚신과 홑옷으로 추위를 이겨내는 것은 물론, 해발 4000m 높이의 설산 20여 개를 넘을 때는 고산병과도 싸워야 했다. 초원을 지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칭짱(青藏)고원 동부의 쑹판(松潘)을 지날 때가 가장 그러했는데, 면적이 1만5200km2에 달하는 데다 곳곳에 패인 길을 걷고 수렁에 빠지기를 반복해야 했다.
“공기가 희박해질수록 숨쉬기 조차 힘들었고 말하는 건 아예 불가능했다. 얼마나 추운지, 숨만 내쉬어도 얼음이 얼 정도에 손과 입이 퍼렇게 됐다. 한 걸음을 잘못걸어도 빙하에 빠져 생사를 달리했다. 주저 앉아 헉헉 거리며 숨을 쉬다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기도 했다.”중국공산당 지도자 중 한명인 둥비우(董必武)는 설산을 넘을 때를 떠올리며 이같이 말했다.
홍군을 이끌었던 중국공산당은 목적지였던 산베이(陜北)에 도착한 이후 전국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며 일본 침략세력과 함께 국민당을 격퇴하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다. 기적과도 같은 장정이 있었기에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이라는 승리의 순간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1921년 창당한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봉건군벌세력 전복을 위한 대혁명을 추진했으나 결국 실패했고, 국공합작 또한 결렬됐다. 이후 국민당 반동파의 부패정치를 타도하기 위해 중국공산당은 단독으로 토지혁명과 무장투쟁을 지휘했으며, 공농(工農)홍군과 혁명의 근거지는 끊임없이 확대됐다. 1933년에 이르러 장시(江西)성 남부, 푸젠(福建)성 서부의 혁명근거지를 토대로 발전한 중앙소비에트지역에 60개의 행정현(縣)이 설치됐으며, 총 인구수는 435만명, 면적은 8만4000m2에 달했다.
1935년 1월, 중국공산당 중앙은 장정 중 ‘쭌이회의(遵義會議)’를 개최함으로써 극좌 교조주의의 당 내 통치를 종식시키고 중국공산당 중앙과 홍군의 지도지위를 마오쩌둥에게 위임했다. 중국공산당사(史)에 있어 생사의 전환점으로 기록된 ‘쭌이회의’는 중국공산당의 뛰어난 자아반성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며, 중국공산당이 정치적으로 성숙해지기 시작했음을 상징한다.
덩샤오핑(鄧小平)은 앞서 “장정은 어쩔 수 없이 시작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물론 장정이 당 내부의 극좌 교조주의의 착오와 국민당의 군사적 포위로 인해 시작된 것은 사실이지만, 공산당원은 항일구국을 위해 힘쓰며 장정 중에도 선전과 항일 전쟁을 전개하고 민중의 홍군 참여를 이끌어냈다. 특히 항일구국의 강력한 호소력이 궁벽한 지역까지 울려 퍼지면서 홍군은 민중의 존경과 지지의 대상이 됐다. 홍군은 또 발길 닿는 곳마다 가난한 민중을 돕고 토호를 타도했으며, 재산을 분배하고 세금을 없앴다. ‘홍군을 옹호해야만 승리할 수 있고, 공인과 농민이 해방될 수 있네’라는 동요 가사가 등장하고, ‘배 곯는 가난한 사람들은 어서 홍군을 따르라’, ‘홍군은 가난한 이의 구세주’라는 표어가 유행한 것에서 당시 홍군의 인기를 실감케 한다.
구이저우(貴州) 비저우(畢節)에서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그 지역 저명인사였던 저우쑤위안(周素園)에게 마르크스 레닌 이론과 중국공산당의 주장을 설명했다. 이후 저우위안수는 공산당이 이끄는 구이저우 항일구국군 사령을 자처했고, 홍군의 장정에 동행했다.
소수민족지역을 지날 때면 ‘총정치부 소수민족 쟁취 공작에 관한 훈령(總政治部關於爭取少數民族工作的訓令, 훈령)’에 따라야 했다. ‘훈령’은 ‘소수민족의 풍속과 문화를 절대적으로 존중하고, 그들의 습관을 전사에게 설명해야 한다. 소수민족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대(大)한족(漢族)주의의 우둔한 편견을 엄격하게 반대한다. 모든 병사가 소수민족에게 홍군의 주장을 선전하고, 특히 민족주의와 민족평등을 알린다’ 등을 골자로 한다. 윈난(雲南) 중뎬(中甸) 지역에서 당의 민족종교정책을 엄격하게 집행함으로써 홍군은 중뎬 구이화사(歸化寺) 8대 노승을 포함한 티베트족 동포의 신임과 지원을 얻었으며, 구이화사는 홍군을 위해 5만kg의 식량을 조달해주었다.
미국 기자 에드거 스노우(Edgar Snow)는 저서 <중국의 붉은 별>에서 ‘최고위 지휘관에서부터 말단 병사까지 먹고 입는 데 차이가 없었다’, ‘공산당에 고액의 급여를 받거나 부패한 관료, 장군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의 다른 군대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어 대부분의 군비를 횡령했다’고 기술했다.
장정은 고되고 위험했지만, 중국공산당은 이상을 가지고 있었고 담력과 식견이 있었으며 지혜가 있고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중국공산당의 기치는 민중을 일깨웠고, 홍군이 가는 길목마다 홍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1935년 2월, 윈난 자시(紮西) 주민 3000여 명이 홍군에 참여한 데 이어 1935년 4-5월에는 쓰촨(四川) 장유(江油)와 중바(中壩) 주민 6000여 명이 홍군에 동참했다. 잠정 통계에 따르면, 1934년 11월부터 1936년 9월까지 장정 행군에 따라 홍군에 참여한 사람은 약 4만3000명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오쩌둥은 장정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장정은 유사이래 최초다. 장정은 선언서이고, 선전대이며, 파종기(播種機)다. 장정의 승리를 만든 것은 누구인가? 공산당이다. 공산당이 없었다면 장정은 상상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소수로 다수를, 약함으로 강함을 이긴 중국공산당은 좌절 속에서 다시 태어났다. 시대 흐름에 순응하면서도 굳은 이상을 품었다. 민중의 바람에 귀 기울이면서 희생정신을 잃지 않았다. 이것이 곧 중국공산당이 장정의 기적을 쓸 수 있었던 힘이며, 장정이 중국공산당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이다. 또한 이 같은 유산은 장정 이후의 혁명과 건설의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의 가장 귀중한 재산이 되었다. 중국공산당 시진핑 총서기가 “장정은 이상과 신념의 위대한 여정이다. 장정은 진리를 시험한 위대한 여정이다. 장정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준 위대한 여정”이라고 말한 그대로다.
2016년 10월 21일, 중국공산당 중앙은 홍군 장정 승리 80주년 대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시진핑 총서기는 “위대한 장정 정신은 당과 인민이 거대한 대가를 치르고 위대한 투쟁을 통해 얻은 고귀한 정신 자산이다. 우리는 대대손손 장정의 위대한 정신을 기리고 장정의 장정의 위대한 정신을 배우며 장정의 위대한 정신을 드높여야 한다. 장정의 위대한 정신을 우리 당과 우리 나라, 우리 인민, 우리 군대, 우리 민족이 끊임 없이 미래로 나아가는 강대한 정신적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 인민은 장정 정신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발전에 자신감을 가지고 인류의 미래에 책임을 지는 것, 이것이 바로 장정의 심오한 뜻을 기리는 방법이다.
본문 중 일부 사료(史料)는 <중국 공농홍군 장정 승리 80주년 테마 전시회>에서 인용함
* 본 기사는 중국 국무원 산하 중국외문국 인민화보사가 제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