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교의 세상보기] 훙샹그룹 본사가 단둥에 있는 건 뭘 말하나?
2016-09-30 10:38
이 곳 전시실에서 단연 눈길을 사로잡는 사료는 김일성 편지다. 김일성은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 15일) 뒤 전세가 뒤집히자 10월 1일 마오쩌둥(毛澤東)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하는 친필 서신을 보낸다. A4 용지 크기 갱지에 한글로 쓴 편지는 이제 쭈글쭈글한 채 누렇게 변했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틀린 글자를 그대로 고치거나 빠트린 글자를 행간에 끼워 넣기도 했다. ‘존경하는 모택동 동지 앞’으로 시작한 서한은 “미군 침략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전에는 우리 형편이 괜찮았다”면서 특히 미 공군에 속수무책인 상황을 토로했다. 편지 중간에는 ‘친애하는 모 동지시여’라는 극존칭 표현도 썼다.
그 뒤 10월 19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이끄는 병력이 단둥과 신의주를 잇는 압록강 철교를 건너 북한 땅으로 들어갔다. 지금은 압록강 단교로 불리는 이 다리 단둥 쪽 시작 부분에는 펑더화이가 출병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대형 동상이 자리잡고 있다. 단둥 부근에는 이 밖에도 6·25전쟁 관련 유적이 적지 않다. 단둥 시내에서 60㎞가량 떨어진 허커우춘(河口村)에는 마오쩌둥 장남으로 전쟁 당시 북한에서 사망한 마오안잉(毛岸英)의 동상과 마오안잉 학교가 세워져 있다. 인민지원군 병력이 대규모로 압록강을 건너기 위해 강바닥에 나무 말뚝을 박아 만든 압록강 부교도 단둥에 있다.
단둥은 전쟁 중 최일선 도시로 물자를 조달하는 등 병참기지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중국은 6·25 당시 보가위국(保家衛國·고향과 나라를 지킴)이라는 구호 아래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모금 운동을 벌였다. 그래서 단둥은 ‘영웅 도시’로 불린다. 원래 지명이었던 안둥(安東)에서 단둥(丹東)으로 바뀐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중국공산당을 상징하는 ‘붉을 단(丹)’을 넣은 것이다. 1960년대의 일이다. 붉은 도시, 즉 공산당의 도시라는 뜻이다. 항미원조기념관 뿐 아니라 항미원조정신연구회가 단둥에 있는 것도 자연스럽다. 연구회는 6·25 관련 세미나를 개최하고 자료를 발굴하는 등 꾸준히 활동한다.
이러한 단둥은 동북 3성(랴오닝, 지린, 헤이룽장) 중에서 한국, 북한, 중국 간 물밑 정보전이 가장 뜨거운 현장이기도 하다. 북·중 접경지역에서 활동하는 한국 측 정보원, 인권운동가, 선교사 등의 내왕이 많은 만큼 북한이나 중국 측 정보원들도 활발하게 움직인다. 신분을 감춘 비밀정보원 ‘블랙’과 이들의 협력자 휴민트(HUMINT·인적 정보)가 부지기수라는 의미다. 누가 블랙인지, 휴민트인지는 자신만이 안다. 노출되면 그 날로 끝이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이렇다보니 이 곳에서 대북 사업을 하는 조선족(중국 국적)이나 중국 기업인들은 낯선 사람을 만나기를 극도로 꺼린다.
북한을 위해 달러 자금 세탁을 해주고 핵 개발 물자를 제공한 혐의로 주목받고 있는 훙샹(鴻祥)그룹 본사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건 뭘 말하는가. 훙샹 본사는 단둥 시내 압록강변 전망 좋은 빌딩에 자리잡았다. 단둥에서는 북·중 교역의 70% 가량이 이뤄진다. 지정학적으로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양국 간 순망치한(脣亡齒寒) 관계를 단둥보다 더 극명하게 보여주는 곳은 없다는 얘기다. 미국 법무부와 재무부는 훙샹 자회사 단둥훙샹실업발전을 형사 기소한 데 이어 자금세탁 의혹이 있는 중국 은행 계좌에 남아 있는 훙샹 자금을 몰수하기로 했다. 중국 당국도 훙샹에 대한 조사 강도를 높여 뒤를 봐준 단둥시 당서기를 전격 경질했다.
그러면서도 중국 정부는 미국의 압박에 밀려서 중국 기업을 수사하는 게 마뜩지 않다는 표정이다. 중국 외교부가 지난 27일 정례 브리핑를 통해 “어떤 국가라도 국내법을 중국 기업이나 개인에 확대 관할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밝힌 게 이러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미국 주도로 유엔이 대북 제재를 가하면 과연 북한만 당할까. ‘대북 사업’에 종사하는 수많은 중국내 업체와 개인들도 곤경에 빠지기는 마찬가지다. 중국 정부가 북한에 대한 제재 고삐를 죌수록 이들의 그림자도 짙게 깔릴 수밖에 없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후에 미국 군수업체가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북·중 거래 뒤에는 수많은 ‘훙샹’이 자리잡고 있다. 즉 훙샹그룹이 아니더라도 북한과 짬짜미를 할 중국 기업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이런 중국이 불만스럽긴 하지만 우리 입장에 동조해 달라고 요구하는 데는 한계가 따른다. 대국을 자칭하면서 대북 제재라는 국제적 책임은 소홀히 한다는 지적 쯤이야 아랑곳하지 않는다. 미국의 패권 전략도 이에 대한 중국의 대응도 우리를 위한 건 아니다. 한반도 안정을 넘어 통일까지 가려면 우리가 주변 강대국을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남북한 관계를 주도하지 않으면 주변 강대국의 입김에 휩쓸릴 수 밖에 없다는 쓰라린 사실도 잊어선 안된다. 북한과 중국이 순망치한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아주경제 중문판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