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98]국제회의에서의 소신 발언···각국 대표의 공감 얻어

2016-08-23 13:01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98)
제6장 재계활동 - (93) IPU 회의 단장으로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제6대 국회에서 두 차례 국제회의에 참석하는 기회를 갖는다. 1964년 8월, 일본 자민당(自民黨)의 상공분위(商工分委) 초청과 1965년 4월 국제의원연맹(IPU) 회의에 단장으로 참가한 것이 그것이다.

일본 자민당의 초청은 정일권(丁一權) 내각(內閣)이 들어서서 계엄령을 펴고, 한·일회담(韓·日會談) 반대운동을 계엄령으로 다스리게 되는가 하면, 김종필(金鐘泌)은 당직 사퇴에 이어 다시 자의반 타의반(自意半 他意半)의 외유(外遊) 길에 나서고 있을 무렵이었다. 고대(高大)는 아직 휴교령(休校令)으로 문을 닫고 있었다.

이런 험악한 한·일 관계의 소용돌이 속에서 공화당은 목당에게 일본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마음이 내킬 턱이 없었다.

때마침 목당은 발을 다쳐 집에 누워 있었으므로 거동이 불편하여 갈 수 없노라고 거절했지만 연이어 설득사(說得使)가 집에 찾아왔다. 새로운 당의장(黨議長)에 오른 정구영(鄭求暎)의 배려였는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마음 내키지는 않았지만 끝까지 거절할 수는 없어 민중당(民衆黨) 소속의 함덕용(咸德用)과 같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자민당과 게이단롄(經團聯)의 초대연(招待宴)에 참석하고 산업시찰을 하는 등 공식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고, 교포단체(僑胞團體)의 초대를 받는 등 바쁜 일정을 보내기 바쁘게 목당은 돌아오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해 4월에는 IPU 춘계회의(春季會議)가 아일랜드 수도(首都) 더블린에서 개최되었는데 거기에 또 단장(團長)으로 나가라는 것이었다.

김종필의 2차 외유 동안 공화당엔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여·야 협상에서 야당의 카운터 파트너로 나선 공화당 대표단은 이효상(李孝祥) 국회의장과 백남억(白南檍) 정책위원회 의장 등 민간인 출신의 당료(黨僚)였다. 이들은 김종필이 퇴진해 외국으로 나간 사이에 김종필 중심의 주류에 맞서는 반김종필 진영인 4인 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4인 체제의 중심인물은 백남억 정책의원장, 길재호(吉在號) 사무총장, 김성곤(金成坤) 재정위원장, 그리고 김진만(金振晩) 원내총무였다. 이들 4인 체제는 6·3 사태 이후의 여·야 관계를 조정해 국회를 이끌어 가는 주역으로서 대통령의 공화당측 브레인으로 그 자리를 굳혀 나갔다.

김종필은 1964년 12월 말 해외여행에서 돌아왔지만 뒷전으로 물러앉아 있어야 했다. 이런 마당에 목당에게 IPU 회의 단장 교섭이 온 것이다. 공화당 안에서도 한 걸음 물러앉아 있는 목당에게 이와 같은 중요한 회의의 단장으로 가라는 것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김종필 구주류(舊主流)가 내세운 것도 아닐 것이고 4인조 그룹이 밀었을 턱도 없는 일이었다. 박 대통령의 지시임에 틀림없었다.

이에 앞서 공화당 중앙당 의장 선거가 있었는데 대통령의 지시라 하여 목당이 지목되었는데 전례용(全禮鎔)이 의장으로 선출된 일이 있었다. 구주류를 비판하고, 그렇다고 4인조(4人組) 세력(勢力)에도 접근하는 일이 없어 보이는 목당을 박 대통령은 늘 관심을 갖고 바라보았던 모양으로, 구주류와 4인조의 분열작용이 벌어지고 있는 공화당에 목당을 중앙당의장(中央黨議長)으로 앉히려는 저의를 가졌던 모양이었다. 비록 구주류의 작용으로 실현은 되지 않았지만.

이리하여 박 대통령이 목당을 표면에 등장시키기 위한 조처로 IPU 회의 단장을 지명하게 된 모양이었다.

일행은 목당을 단장으로 하여 무소속의 최희송(崔熙松)을 대표로 하고 전문위원 김형훈(金炯薰)이 그들을 수행했다. 의회 관계의 국제기관(國際機關)인 IPU는 95년(1965년 기준)이라는 역사와 78개 국에 회원을 두고 있었으며, 그 구성원은 각국 국회의원으로 되어 있었다. 오늘날 그 기구가 국제정치(國際政治)에 미치는 영향력은 국제연합(UN)과 맞먹으리 만큼 강력하다. 한국은 1965년 8월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의 제53차 총회 때 정식으로 가입의 승인을 얻었고 그때 같이 신청한 북한의 가입 문제는 심의(審議)가 보류되고 말았다. 이 회의 때의 한국대표단(韓國代表團)은 단장 나용균(羅容均), 대표 최치환(崔致煥)·박준규(朴俊圭)·김창근(金昌瑾)·강문봉(姜文奉)·김성용(金星鏞), 수행원 김형훈(專門委員(전문위원))이었으며, 정식 가입 후 최초로 개최된 IPU 춘계회의(春季會議)에 목당이 단장으로 참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행은 뉴욕을 거쳐 더블린으로 들어갔던 모양으로, 4월 17일잘 부인에게 띄운 편지를 보면

‘금야(今夜) 9시(時)에 이곳을 출발하야 아일랜드(愛蘭)으로 향(向)할 예정(豫定)이오. 우리 영사(領事)로부터 본국 소식(消息)을 만문(晩聞)한 바 아직 학생(學生) 데모가 계속한다니 매우 걱정이오·····’

라고 쓰고 있어 목당은 해외에 나가서도 국내에서 계속되는 학생 데모를 걱정하고 있었다.

회의는 1주일 동안 진행되었던 모양으로 4월 25일자 편지에서 ‘금일(今日) 오후(午後) 2시에 폐회(閉會)하였소’라는 서두로 시작하여 ‘꼭 1주일간(週日間) 매일(每日) 오전(午前) 오후 각분위(各分委)에 출석한 관계로 대단히 피곤하오. 그런데 작금(昨今) 이사회(理事會)에서 역시 예상(豫想)한 바와 같이 인도네시아 제안(提案)과 베트남(越南) 문제로 회의가 상당히 긴장하였소. 결국 자유국가(自由國家) 의도(意圖)대로 낙착은 되었으나 매우 힘이 들었소. 문제된 인도네시아 대표(代表)의 제안에 대하여 한국대표로서 내가 강력한 반대 발언을 하였소. 미·영을 위시한 자유우방(自由友邦) 제국(諸國)의 많은 동정을 얻었소. 이러한 국제무대(國際舞台) 경험을 한 나로서 그 순간 흥분된 심정은 실로 형언할 수 없었소. 국가를 대표하야 국제회의에서 하는 발언(發言)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重)하다는 것을 비로소 첨으로 느꼈소. 사실 나 스스로는 무한 감격하였으며 감명(感銘)하였소. 내일(來日) 오후 5시경 이곳을 출발하여 런던으로 향할 예정이오. 약(略) 5, 6일간 체류후(滯留後) 도쿄(東京)를 경유 귀국(歸國)할까 하오. 앞으로는 다소 휴양할 기회가 있을 것 같소. 사실 이곳 온 후 회의에 안비막개(眼鼻莫開, 눈코 뜰새 없이 바쁨)로 분주불안(奔走不眼) 하였소. 나의 건강은 매우 좋아졌소. 안심(安心)하오. 총총(怱怱), 이만’이라고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