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97]공화당 의원들의 부정·부패에 실망

2016-08-23 13:00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97)
제6장 재계활동 - (92) 환멸(幻滅)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1967년 5월 3일, 제6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박정희(朴正熙)가 당선되고 이어 6월 8일에는 제7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지역구를 잃고 비례대표(比例代表)로 약속받았으나 거기에서 막판에 제외되어 정계(政界)에서 물러서고 말았다.

목당은 이미 정치활동(政治活動)에 대한 의욕을 잃은 지 오래되었다.

공화당 창당위원(創黨委員)이 되어 당무위원(黨務委員)으로서 재무위원장직을 맡아 창당을 도왔지만 혁명주체들의 독주(獨走)와 부정·부패는 환멸을 주었다. 한번은 청와대 수출확대회의(輸出擴大會議)에 참석한 뒤 경제단체장(經濟團體長)만이 박 의장의 오찬에 초대된 일이 있었다. 목당은 “박 의장, 부정부패가 심한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자 박 의장의 안색이 홱 달라져서는 시무룩해지더니 독백(獨白)하다시피 “그 사람들 너무 배가 고파서·····”라고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얼굴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동석했던 한국경제인협회(韓國經濟人協會) 김용완(金容完) 회장이 목당의 허벅다리를 꼬집었고 대한상공회의소(大韓商工會議所) 송대순(宋大淳) 회장은 당황하여 “그럴리야 있겠습니까? 남을 헐뜯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과장해서 하는 말들입니다”하고 얼버무리는 것이 아닌가.

송 회장의 얼버무리는 것이 거슬렸지만 박 의장의 표정이 심각하여 목당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날의 오찬은 결국 어색하고 뒷말이 개운치 않은 채로 끝이 나고 말았다.

돌아오는 길에 동은(東隱) 김용완(金容完)이 목당을 나무랬다.

“아, 이 사람아, 그 사람은 주체들의 부정부패를 모르고 있는 줄 아나. 자네보다 더 잘 알고 더 심각하다네. 거기다 대고 하필 자네가 남의 아픈 곳을 찔러 어찌하자는 건가?”

동은의 말이 옳았다. 그러나 그 좌석에서 말을 얼버무리려 한 송대순의 태도는 목당에겐 한갓 비굴로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송대순, 그 사람 못쓰겠더군!”

하고 목당이 한마디 하니, 동은이 받아 말했다.

“자네 같은 멍청이보다는 송대순이 몇 배 똑똑하다네!”

동은의 험구(險口)엔 손을 드는 목당이어서 입을 다물고 말았지만 그의 충언(忠言)을 “그 사람들 배가 고파서·····”라고 흘려버리는 박 의장의 애매한 태도는 목당에게 어떤 좌절을 안겨다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혁명주체(革命主體)들이 안하무인격으로 저지르는 부패와 부정은 목당으로 하여금 참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 목당이므로 그는 어느 날 당무회의에서 “세상에서 무어라 하는지 아십니까? 공화당이 부정·부패로 썩어간다고 합니다”라고 내뱉고 말았고 반응은 과연 날카로웠다. 당무위원의 태반이 주체들로 구성되어 있는 마당에 감히 그런 말을 하다니, 하는 그런 분위기였다.

“여보세요, 이활 의원, 그게 무슨 말입니까. 증거를 대세요, 증거를. 내놓고 말씀 하세요.”

멱살이라도 잡을 듯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 위원도 있었다. 그러나 목당도 물러서지 않았다.

“증거요? 세상 사름들이 다 그렇게 말하는데 무슨 증거요? 백성들이 따르지 않으면 정치 못해요. 증거가 무슨 놈의 증거요?”

거세게 맞서는 목당의 서슬에 소리치던 위원은 주춤 물러섰다. 목당에게 있어 그런 과격한 표현은 보기드문 일이었다. 목당이 그런 이야기를 할 때에는 적어도 어떤 결단이 있어서 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이날부터 목당은 공화당과 실질적으론 작별을 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어제는 창당위원으로 몸담고 창당을 도왔으면서 그 정당이 부패했다고 해서 밖에 나와 자신이 소속하고 있는 당을 헐뜯을 목당은 아니었다. 그것은 사내로서 더없이 비열한 짓이라고 생각하는 목당이기 때문이었다. 그런줄 모르고 몸 담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도 생각할 뿐이었다.

아무튼 당무회의에서의 부패(腐敗) 발언을 계기로 목당이 정치활동에 의욕을 잃은 것만은 확실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기 위한 도당위원회(道黨委員會)의 개편작업이 있을 때이다. 영천 지구의 공천을 받은 목당이요, 앞으로의 정계진출을 위해선 경북도당위원장(慶北道黨委員長)의 자리는 일종의 요직이었다. 중앙당(中央黨) 의장 및 국회의장이 약속되어 있는 자리였던 것이다.

경북의 각 지구당 사무국장들은 도당위원장으로 목당을 지목했고, 또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개편대회를 앞에 두고도 목당은 대구에 얼굴도 내밀지 않았고 개편대회가 있는 날에야 열차에서 내려 대회장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정계에 나서겠다는 사람이 정계에서의 위계(位階)를 약속하는 도당위원장 선거에 이렇게 소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선거 결과는 이효상(李孝祥)이 1표 차로 목당을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중앙당 사무국의 독주(獨走)를 못마땅하게 생각해 온 지구당 사무국장들이 이효상을 민 것이다. 이때만 해도 공화당의 조직은 일사불란(一絲不亂)의 결속으로 동요를 보이지 않았는데 경북 도당에서 이변이 생겼다. 결국 이효상은 국회의장이 되었고 목당은 평당원(平黨員)으로 머물게 되었다.

이로부터 실의(失意)에 찬 목당의 국회의원 생활은 시작되었다. 목당에게 있어 국회의원 활동이란 자연 대수롭지 않은 게 되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