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81]무소속 출마, 낙선

2016-08-05 17:55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81)
제4장 재계활동 - (76) 민의원 선거에 고배(苦杯)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유엔(UN)의 감시 하에 이 나라에 처음으로 실시된 5·10 선거 이래 4차례의 총 선거, 3차의 정·부통령 선거와 지방선거 등 여러 차례의 선거를 치렀으나 5·10 선거를 제외하고는 공명선거를 치루지 못했다. 항상 관권(官權)이 개입하여 탄압과 협잡 등 부정·불법의 난무(亂舞) 아래 치러졌었다. 그러나 자유당의 부정·부패와 부정선거가 원인이 되어 몰락한 마당에 치러지는 7·29 선거는 제1야당인 민주당에 표가 쏠리는 일방적인 선거가 치러지게 마련이었다.

학생들이 이룩한 민주혁명(民主革命)은 민주당의 독무대를 조성할 것이 틀림없었다. 민의원 선거에 입후보(立候補)하여 출마하려면 민주당 공천만 있으면 영락없이 당선될 것이었다.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민주당 안에 지면(知面, 척 보아서 알 만한 안면)미 많았다. 한민당(韓民黨) 때의 동지들도 있었고 무역협회의 회장단의 멤버였던 주요한(朱耀翰)과 김용주(金用周) 등도 민주당에 참여하고 있었는가 하면 상의회장(商議會場) 전용순(全用淳)도 있었다. 목당은 공천을 낙관했다.

그런데 사태는 그리 만만치 않았다. 공천 마당에서 신·구파는 자파(自派)의 공천에만 급급했다. 민주당 최고의원 곽상훈(郭尙勳)은 공천을 부탁하는 목당에게 정치자금을 기부하고 참의원(參議院)으로 나서라는 것이었다. 목당은 이왕 국회에 나가려면 민의원(民議院)에 참여할 것을 원했다. 돈을 내가면서 참의원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나익진(羅翼鎭)이 주요한을 만나 목당의 공천을 상의했으나 그동안 당을 위해 활동을 하고 기반을 다져 온 사람이 있는데 될 이야기냐는 투의 태도였다. 이미 당론(黨論)으로 확정되어 있음을 알아차린 목당은 무소속 출마를 결심했다. 아들 병린(秉麟)은 그의 결심을 들으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민주당 공천이라면 몰라도 무소속 출마는 모험이라고. 그러나 일단 결심을 한 그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란 것을 아들은 잘 알고 있었다. 목당은 영천 갑구(甲區)에 입후보했다. 영천에 기반을 구축하고 있는 권중돈(權仲敦)은 민주당 구파(舊派)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목당이 신파(新派)의 곽상훈을 찾아 공천을 부탁한 것도 권중돈이 민주당 구파의 공천을 받을 것을 고려해서 취한 행동이었다.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이상 권중돈과의 경합을 피해야 했다. 권중돈이 을구(乙區)로 나온다기에 하는 수 없이 목당은 갑구를 택해 입후보했다. 이것은 큰 잘못이었다.

을구는 영천이씨(永川李氏) 지반이요, 목당가(牧堂家)가 토지개혁으로 땅을 잃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임고면(臨皐面) 일대엔 적지않은 땅을 갖고 있어 소작농들이 혜택을 입고 있었다. 이런 터에 권중돈과의 경합을 피하자는 생각만으로 그를 피해 갑구에 등록하고 있었던 것이다.

갑구엔 무소속으로 목당이 출마했고 민주당 신파 공천의 조헌수(趙憲洙)라는 젊은이가 등록하고 있었는데, 조헌수는 천주교 청년단을 이끌어 온 젊은이로 신자들의 표를 배경으로 입후보하고 있었다. 영천에 천주교가 들어온 것은 1904년으로 그 교세는 만만치 않았다.

민주당의 신·구파 관계는 어제 오늘에 생긴 것은 아니다. 이미 창당 당시부터 잉태된 고질이었으나 여태까지는 투쟁과정에서 공동보조를 취해 왔었다.

대적할 상대가 없는 이 때의 사정은 신·구파가 경합되었을 경우엔 신파가, 낙천한 곳에선 구파가 당선되게 마련이었다. 영천처럼 갑·을구에 신·구파가 단일 공천되고 있을 경우 이들은 공평하게 모두 당선되게 마련이었다. 목당에겐 외로운 투쟁이었다.

선거전(選擧戰)에 들어가자 초반전은 자유당의 김상도(金相道)와 민주당의 조헌수(趙憲洙) 후보의 공세가 신랄하여 목당을 당황케 했다. 상대방은 목당측의 약점을 여지없이 폭로하고 나섰고, 유권자들도 이에 동조하는 형편이었다. 이에 맞서는 목당으로선 30여 세의 젊은이가 자기를 헐뜯는다고 맞싸울 수도 없었고 그의 성품이나 선거 도의(選擧 道義)로 보아도 그런 야비한 짓은 할 수 없었다.

목당은 차원을 달리하여 자유당의 부정·부패와 독재를 규탄하고 학생들의 민주주의 혁명을 설파하는 간접호소(間接呼訴)로 맞서게 되니 다른 입후보자들의 적극 공세에 뒤질 수밖에 없었다.

영천 이부자네가 영천을 위해 한 일이 무엇이냐, 영천에 중학교를 세우자고 했더니 이부자네는 사돈이 경영하는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에 땅을 기증하지 않았던가. 목당은 1년에 한 두 번 영천에 얼굴을 비칠 뿐 영천을 위해 한 일이 무엇이냐 하는 공격이었다.

이에 맞서야 하는 목당으로선 정견발표회(政見發表會)가 상대방에 대한 공박회(攻駁會)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학생들의 피로 민주혁명(民主革命)을 이룩하고 치르는 민주 선거가 이래서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진정한 민주주의 모범정치를 이룩하기 위해 치르는 7·29 선거가 아니겠는가 하고 외치는 것이 전부였다. 고대 유진오(兪鎭午) 총장과 김상래(金相淶)·조동필(趙東弼) 교수들의 응원도 보람 없이 개표 결과는 1500의 표차로 목당은 낙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