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34]수출지식·경험 없어 헐값 수출···밀무역 성행

2016-07-11 09:02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34)
제2장 재계활동 - (29) 초기 무역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무역협회에 일원으로 참여하게 된 것을 하나의 사명감으로 받아들였다는 얘기는 이미 앞에서도 했다. 신(新)국가 건설은 무역을 통해서만 이룩된다는 것을 신념으로 하고 있는 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발을 들여 놓고 보니 날이 갈수록 한국 무역이 정상 궤도에 오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목당은 절감하게 되었다. 민족자본이 영세하고 수출자원은 빈약했다. 면허를 받은 무역회사는 500여개가 넘었지만 이들은 화상(華商, 중국화교상인)들의 상관(商館, 경영주가 외국인인 상점)을 드나드는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정상적인 업자들이 무역을 하기엔 자금 조달의 어려움과 수출입에 대한 무역 수속의 복잡성, 사정가격(査定價格, 관청이나 기관에서 조사하거나 심사하여 매긴 가격)의 비현실성, 수출물자의 결핍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갖은 애로가 가로놓여 자주무역 건설이란 생각할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중국 업자들을 비롯한 외상(外商)들이 무역계를 농단하고 주도권을 장악해 가는 것이 눈에 환히 보였다. 수입되는 물자도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에 한하여야 할 것임에도 사카린이나 배갈, 땅콩 등 생활필수품이라고 볼 수도 없는 품목들이 태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될 터인데!’

하고 생각하는 목당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혼자 걱정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회원들이 이런 것들을 스스로 알아차리고 문제를 제기해야만 비로소 문제로 다룰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면에서도 무역조사단이 우선 다급한 대로 소규모나마 파견된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물론 욕심 같아서는 협회 직원이 참여할 수 있다면 더욱 이상적이겠지만 그것은 당장엔 무리한 욕심이었다.

1946년 한 해에 300척이 넘는 정크선이 인천항을 들락거렸음에도······ 주요 수입품이란 것이 다음과 같았다.

땅콩   3067만5000원   술           432만9000원
유리   1668만2000원   콩기름     383만원
후추   1621만2000원   탄산소다  206만3000원
땅콩기름   1116만원   가성소다   135만원
설탕    591만2000원

대부분이 소비성의 사치품인데도, 정크 무역으로 치부를 하는 화상들이 속출하면서 한국이 황금시장으로 알려지자 중국 재벌들도 구미가 동했는데, 마오쩌둥(毛澤東)의 남진(南進)으로 전쟁중에 있던 중국은 군수물자가 그중 시급하게 필요했다.

재벌과 군벌들은 전쟁상인으로 한국 시장에 일인(日人)들이 남겨 놓고 간 전략물자를 사들여 한몫 보려고 무역선을 이끌고 우리나라 항구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마카오 무역이었다.

마카오 무역은 1947년 3월 17일 페리어드 호(영국계 선박회사 태평양 소속 2000t급)가 인천항에 들어오면서부터 이 해 8월 홍콩 무역선 아이비스 호가 부산에 입항하기까지의 6개월 동안을 말한다. 만주와 북지(北支, 화북(華北))를 점거했던 중공 세력이 점차 남진하여 정크무역의 본산이던 톈진(天津)과 상하이(上海)가 그들의 수중에 들어감으로써 정크 무역이 쇠퇴해가는 무렵 페리어드 호의 입항은 당시 무역업계의 큰 경사였다.

당시 홍콩 무역업자들은 영국령 홍콩 정청(政廳, 정무를 행하는 관청)의 수출입에 대한 통제가 엄격하여 홍콩이나 동남아 각지로부터 수집한 화물에 대해 수출 허가를 해주지 않자, 홍콩과 가까운 중계무역항인 마카오 정청에서 수출허가를 받아 수출하게 되었다. 마카오 무역이란 말도 실은 여기에 비롯되고 있었다. 그들은 앞을 다투어 4000~5000t의 화물선에 생고무·소금·설탕·신문용지 등의 생필품과 화장품·라이터·비누 등 일용잡화를 싣고 들어왔다.

우리나라는 아직 미군정하에 있었고 외국과 외교 관계도 맺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선박이 자유로이 외국항에 입항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고, 어느 나라 정부도 한국으로 향하는 선박이나 수출물자의 출항을 허가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가능한 것은 오직 밀무역(密貿易) 뿐이었다.

정크 무역을 일종의 밀무역으로 봐야 하는 이유도 당시 군정 당국이 수출입 허가를 하는 등 통제를 하긴 했지만 상대방 정부의 허가가 없는 무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마침내 쌍방 정부가 함께 승인하는 합법적인 무역이 마카오 무역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포르투갈령이던 마카오의 정청이 한국으로 가는 물자에는 수출 승인서를 발급해 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에 해방 후 최초의 합법적인 무역선으로 페리어드 호가 생고무·양판지·신문용지 등 물자를 가득 싣고 들어왔다. 이들이 싣고 온 물자가 퍼지면서, 고급품이면 으레 마카오제(製)라고 하고 멋지게 양복을 뽐내 입은 사람을 마카오 신사라 했으며, 마카오 양복, 마카오 신문지라 하는 등 일찍이 없었던 마카오 붐이 일어났다.

페리어드 호에 이어 산 제르니모 호 등이 또 연이어 들어왔는데 마카오 무역은 그 해 3월에서 9월에 이르는 동안 입항한 5대 무역선으로 대표되는데, 당시의 무역일지를 보면 마카오 무역선의 입항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1947년 3월 17일 - 제1차 무역선 페리어드 호 마카오에서 인천 입항
6월 5일 - 제2차 무역선 캔느바 호 인천항에 입항
6월 19일 - 산 제르니모 호 부산 입항
8월 7일 - 엠파이어리부라드 호 부산 입항
8월 25일 - 마카오 호 부산 입항
8월 27일 - 아이비스 호 홍콩서 부산 입항
9월 18일 - 엠파이어딕 호 인천 입항
9월 26일 - 레디엘마 호 홍콩서 인천 입항

제1차 무역선 페리어드 호를 끌고 들어온 사람은 남일성(南一誠)이었는데, 하주는 상하이의 굴지 재벌 장자량(張子良)이란 자와 월남(越南, 베트남)의 재벌 김태성(金泰星), 그리고 상하이임시정부(上海臨政) 내무부장을 지낸 임승업(林承業), 상하이견사창장(上海絹糸廠長) 이광화(李光華) 등의 거물들이었다. 산 제르니모 호의 하주는 또 중국 5대 재벌의 하나인 이옥청(李玉靑)이었으며, 무역일지엔 안 나타나 있으나 이주 호란 무역선이 들어왔는데 하주는 왕조계(汪兆繼)라는 장제스(蔣介石) 정부의 군사 고문으로, 그는 상하이의 재벌이었다.

페리어드 호를 둘러싸고 등장한 거간꾼으로는 당시 조선통신사(朝鮮通信社)의 사장이었던 김승식(金丞植)과 몸짓이 거대한 남궁요녀(南宮堯女)라는 기이한 한 쌍의 인물과 상하이에서 스텡더드 석유회사의 지배인을 지냈다는, 영어가 유창한 임창복(林昌福)이라는 사람이었다. 이들 3인조는 그 후 홍콩에서 생고무 3000t을 적재하고 북한 진남포에 들어가 홍삼과 교환하여 큰 재미를 보기도 했는데, 2차도 또다시 생고무를 만재하고 북한에 들어갔다가 대상 물자도 못 받고 하물을 압류당하는 바람에 빈털터리가 되고 뒷배를 보아주었던 화상도 파산하자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당시 생고무 시세는 t당 50만원이었는데, 행방이 모연해진 이들 3인조는 그대로 북한에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들이었다.

김승식은 일찍이 조선통신사를 차려 언론기관을 배경으로 조선 상공회의소와 경성 상공회의소 설립에 발기인이 되고 상임의원으로 발언권을 행사하는 한편 북성기업회사(北星企業會社)라는 이름으로 무역 면허를 얻어 무역협회에도 가담하여 이사로 있으면서 행세했던 인물이지만, 목당은 그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자기를 드러내 보이려는 허세가 역력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출신이 확실치 않은 것도 목당에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목당은 이런 경우에도 결코 내색은 않지만 자신에 대해 엄격한 만큼 남을 보는 눈도 냉철했으며, 더욱이 한 번 눈 밖에 난 상대는 철저히 경계하는 습성을 그는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비친 김승식은 아무래도 무역협회 초창기의 어설픈 시기를 틈탄 독버섯이었던 것이다.

산 제르니모 호의 하주 이옥청은 서울에 머무는 동안 하루는 명월관에서 술을 마시고 나오는 길에 정체불명의 일당에게 납치되어 당국을 놀라게 했는데, 장택상(張澤相) 수도청장(首都廳長)의 특명으로 수사가 벌어져 무사히 구출해냈다. 그러자 구출 받은 이옥청은 500만원의 거금을 수도청에 기부하여 사례를 했다.

우리측에서 페리어드 호와 큰 거래를 한 업자는 협회 이사회사(理事會社)인 금계상공사(金鷄商工社)의 강익하(康益夏)와 당시 인천에서 무역업을 했던 삼양무역(三洋貿易)의 김규면(金奎冕)을 필두로 많은 업자들이 참여했다. 싣고 들어온 물자는 2000t의 소금을 비롯하여 생고무·원면·면사·모사·빙초산·티크 재 등 원자재로부터 신문용지·모조지·양복지·타월·페니실린·마이신·사카린 등이 있는가 하면 땅콩기름·콩기름·배갈 등 다양했다.

반면에 이들이 가지고 간 대상물자는 페로중석, 페로망간, 흑연이 가장 컸고 연(鉛, 납)파이프·빠피리오·엔소산가리 등 화약 원료였는데, 페로망간·페로중석은 서울 오류동의 소림광업제작소(小林鑛業製鍊所)에서 흘러나온 것이고 화약원료는 조선화약(朝鮮火藥) 회사의 먼지까지 싹싹 쓸어 갔다는 이야기이다.

연파이프는 연이 수출 금지품이라 하여 일부러 파이프로 가공해서 싣고 나갔다. 그리고 국내에서 미군이 불하한 지프차 및 중고 자동차를 해체하여 부품으로 만들어 가져 가기도 했다.

이밖에도 비철금속과 원광석 등 원자재가 나갔고, 오징어·전복·해삼·송이버섯 등 해산물과 농산물도 끼여 있었다.

그런데 페로중석과 페로망간은 한국 업자들에겐 낯선 물자로 어디에 쓰여지는 지조차 아는 사람이 없어 버려진 물자로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국내에 또 시세가 형성되어 있을 리 없었다.

중국인들이 얼마에 사겠다고 값을 제시하면 그것이 얼마든 이게 웬 횡재냐 하는 투로 얼씨구나 하고 팔아넘기는 실정이었다.

마카오 무역 때 들어온 하주들은 모두 군벌과 관계가 있어서 실상 하주로 가장하고 들어온 인물들은 평복을 한 군인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통에 횡재한 인물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오류동에 있던 소림광업제련소의 재고품인 페로중석과 페로망간을 불하받았던 OO물산은 하루 아침에 장안에서 제일가는 현금왕(現金王)으로 등장했다. 페로중석과 페로망간 약 2000t을 수출하였는데 t당 5000달러에서 6000달러씩 받았으니 현금왕이란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페리어드 호의 장자량은 그 후 을지로 입구 네거리의 개성인삼사(開城人蔘社) 건물을 사들여 장풍공사(張豊公司)라는 간판을 내걸고 흑연을 주로 취급했으나, 6·25 남침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

천우사(天友社)는 복사지를 한 배 가득 싣고 들어 온 것을 인수하여 재미를 보았고, 영풍상사가 철광석을 수출하여 기초를 닦은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마카오 무역 6개월에 재고(在庫) 전쟁물자는 거의 바닥이 나다시피 됐다. 바깥 시세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 우리는 황금을 내주고 사탕을 사들인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밀수(密輸)도 극성했다. 워낙 물자가 부족한데다가 행정이 미비했던 관계로 그 틈을 이용한 밀수가 극성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양쯔강(揚子江) 이북이 적화된 뒤로는 상하이와 홍콩, 마카오 등지를 오가는 배가 많아졌으며, 이 지역이 주된 밀수 근원지였다. 들어오는 밀수입품으로는 페니실린이나 마이신 등속의 의약품이 으뜸이었고, 설탕과 소금, 한약재와 페인트 같은 것도 많았다. 그리고 그 대가로는 수산물과 모피류, 청표(靑票, 미국 달러)와 순금이 많이 유출되었다. 일본 상대의 밀수가 부쩍 는 것은 1948년 이후의 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