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차량산업위기] ⑪ “억지로 뭉치면 죽는다?” 뭉치기식 빅딜의 결과는
2016-03-07 06:00
현대로템, 정책의 수혜자인가, 피해자인가? ②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우남 이승만 박사가 한 말이다.
뭉쳐서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을 하나의 신념으로 묶어낼 수 있는 지도자의 강력한 리더십과, 그 신념을 이해하고 나와 뜻이 다른 상대방을 끌어안을 수 있는 포용력이 그것이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모든 이들이 납득할 만한 하나의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IMF 외환위기 여파···재벌 구조조정 1호
1997년 11월, 정부는 모라토리엄(대외채무 지불유예)를 선언하며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사상 초유의 ‘국가부도상태’. IMF는 정부에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요구했고, 정부는 경제위기의 주범 가운데 하나로 재벌들을 지목한 뒤 강력한 구조조정을 주도했다. 단, 겉으로는 재계가 자발적으로 추진하도록 했으니.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 산하에 구성된 구조조정 실무 추진팀(태스크포스)이 주인공이었다. 구조조정의 핵심은 중복투자로 과잉생산 체제를 보이고 있는 부문을 한 두 개 기업으로 통폐합하는 ‘빅딜’이었다. 실무 추진팀은 정부의 요구에 부응해 단기간 내에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각 그룹이 가장 먼저 합의할 수 있는 2~3개 업종에 대해 우선적으로 빅딜을 하기로 했다.
문제는 과거 도태되는 기업들을 시장에서 퇴출하거나 인수·합병(M&A)하는 사례는 있었으나 기업들의 개별 사업부문을 떼어내 하나의 기업으로 묶는 빅딜은 정부나 재벌이나 경험이 거의 없었다. 이들 사업 부문들은 어떤 재벌들에게는 주력사업이었기 때문에 치열한 눈치싸움이 벌어졌다. 1998년 8월 전경련은 철도차량사업의 빅딜을 발표했다.
당시 철도차량산업은 현대정공과 대우중공업, 한진중공업 등 3사 경쟁체제로 이뤄졌다. 1999년말 당시 3사가 보유한 철도차량 생산능력은 현대정공이 연간 600량, 대우중공업이 530량, 한진중공업이 250량 등 총 1380량이었다. 그런데 3개사가 수주한 연간 철도차량은 1993년 1249량으로 정점을 찍은 뒤 1994년 932량, 1995년 592량, 1996년 538량, 1997년 1075량이었다. 같은 기간 공장 가동률은 91% → 68% → 43% → 39% → 78%에 불과했다.
제한된 국내 수요를 확보하기 위해 3개사의 출혈경쟁이 심화돼 채산성을 약화시켰다. 1997년 서울메트로 6호선 전동차 328량을 수주한 현대정공의 경우 1량 당 단가는 4억8500만 원, 1996년 대우중공업이 따낸 인천지하철 1호선 전동차 200량의 단가는 3억8800만 원, 한진중공업이 1995년 수주한 부산지하철 2호선 336량 단가는 4억200만 원이었다. 3개 프로젝트의 낙찰률(발주처 입찰가격 대비 낙찰가격 비율)은 각각 85.1%, 67.8%, 59.7%였다. 출혈경쟁에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준다.
◆일원화 놓고 이해관계 심화
과잉생산체제 상태에 놓이게 된 데에는 1990년대 추진된 철도분야 빅쇼였던 고속철도사업도 한 몫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건국 이래 최대 사업이었던 고속철도사업은 기존 3사는 물론 후발 업체들도 참여를 검토했을 정도로 산업계의 초미의 관심사였으며, 실제로 많은 업체들이 이 시기에 진입했다. 고속철도 수주전은 1993년 현대정공이 고속철도 주제작사로 선정돼 승리를 거뒀다.
기업들의 투자는 고속철도사업 참여가 확실하다는 가정에서 이뤄진 것이었다는 게 문제다. 주제작업체가 선정된 뒤에도 기업들의 과잉 투자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일단 IMF 외환위기가 터지기 직전까지만 해도 국내 기업들은 외형을 불리는 확장에 몰두하는 ‘대마불사(大馬不死)’형 경영에 한창이었다.
결국 이들 기업들은 IMF외환위기를 전후해 한꺼번에 무너졌거나 극심한 자금난을 겪게 됐으니, 생존을 위해선 정부의 구조조정 요구를 외면할 수 없었다. 빅딜 테이블에서 마주한 각 그룹들은 자사의 이익을 위해 치열한 눈치싸움을 벌였다. 이에 전체 사업에서 차지하는 매출비중이 작지 않고, 만성적인 설비과잉 현상을 빚고 있는데다가, 무엇보다 여론의 관심을 거의 끌지 않은 철도차량사업을 빅딜 카드로 내놓았던 배경이 됐던 것으로 추정됐다. 전경련도 철도차량사업이 빅딜의 1순위가 될 것으로 자신했고, 정부 또한 철도차량을 구조조정의 성공사례로 삼아 재벌들의 추가 빅딜을 압박하려고 했다.
그런데 협상이 시작되면서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시장 점유율이 가장 큰 회사로 단일화하는 방안이 유력했는데, 대우와 한진 등이 3사가 일정 비율의 지분을 보유하는 별도 회사로의 설립을 주장한 것이다. 당초 논의대로였다면 1위인 현대가 2개사 사업 부문을 인수하는 방향으로 빅딜이 되는 것인데, 양사는 사업을 내어주긴 하지만 철도차량사업에서의 권리는 그대로 갖겠다는 의도였다. 현대정공도 이미 고속철도 전동차 등 1~2년은 버틸 수 있는 수주물량을 보유하고 있는데다가 무리한 일원화는 경쟁체제에 역행하는 처사라며 단일법인에서 빠지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전경련은 1998년 10월 1일 현대와 대우·한진 통합법인의 이원화 체제가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재계의 발표에 실망한 정부는 여신규제 등을 앞세워 더욱 강력하게 빅딜을 밀어붙였다.
◆“정부가 시켜서 통합했는데, 국제입찰로 독점 깨겠다니”
열흘 여 후, 극적인 타결이 이뤄졌다. 기아자동차 인수자로 낙찰된 현대그룹이 철도차량 단일법인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3개사는 단일법인의 지분율을 4:4:2로 하기로 했으며 △지분 50% 범위 내 외자유치 △외부 전문경영인 영입 △연내 실사 거쳐 단일법인 설립 등에도 합의했다.
국내 철도차량 시장이 3사 경쟁체제에서 1사 체제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철도차량이 의도대로 단일화를 이뤄낸다면 일정 기간 국내 수주를 인정해 주는 등 회사가 생존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주기로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관련 부처와 산하기관 간에도 엇박자가 벌어져 정책의 일관성이 결여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나왔으니, 한 예가 단일법인 출범 결정 후 나온 철도청(현 코레일)의 발표였다.
1998년 11월 11일, 정종환 당시 철도청장은 “철도차량 생산 3사가 단일 컨소시엄을 구성하기로 함에 따라 시장 독점에 따른 가격인상 등의 부작용이 우려 된다”며 “외국 업체들로부터 국제입찰로 차량 일부를 수입해 경쟁체제를 유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통합으로 덩치가 커진 국내 단일법인이 신기술 도입과 과감한 구조조정을 통해 국제 경쟁력을 갖추지 않으면 국제시장에서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외국 거대기업들에 밀려나고 말 것이라는 게 이유였다.
특히 철도청이 그날 공개한 ‘선진국 철도차량사업 기술협력 재편’이라는 보고서를 인용, 미국의 GE, 일본의 히타치, 독일 지멘스, 프랑스 알스톰 등 선진국 철도차량 기업들은 국제간 기술협력체를 구성한 뒤, 중국 등 저임금 국가 차량 조립업체에 조립기술을 이전해 저가로 생산하는 방향으로 국제철도차량 시장 재편을 추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뉘앙스의 차이가 있지만, 당시 발표를 접한 철도차량산업 종사자들은 철도청의 요구가 마치 통합법인이 선진 업체의 하청기업이 돼야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