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독립운동가' 파란 눈의 애국지사, 스코필드

2016-02-28 08:44
독립기념관, 스코필드 박사 선정하고 3월 한 달 동안 전시회 개최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스코필드 박사(오른쪽)와 부인 앨리스.[사진=독립기념관 제공]


아주경제 박상훈 기자 ='3월의 독립운동가'로 故스코필드 박사(1889~1970)가 선정됐다. 

독립기념관(관장 윤주경)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박사를 2016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3월 한 달 동안 개최한다고 지난 26일 밝혔다. 

1889년 영국 워릭셔(Warwickshire)주에서 태어난 스코필드는 1907년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해 세균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1916년 11월 캐나다장로회 선교사 자격으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을 가르치면서 한국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한국인들을 적극적으로 돕고 만세운동 현장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일제의 잔혹하고 비인도적인 탄압에 맞서 싸웠다. 특히 같은 해 4월 6일 일제가 자행한 수원(현재의 화성지역) 수촌리마을 방화현장과 15일 제암리교회 방화 학살사건 현장을 방문해 사진과 보고서를 남겼다. 그가 작성한 '제암리의 대학살'(The Massacre of Chai-Amm-Ni)과 '수촌 만행 보고서'(Report of the Su-chon Atrocities)는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영자신문 '상하이 가제트'와 미국의 장로회 기관지 '프레스비테리안 위트니스'에 게재되며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는 1919년 8월 일본으로 건너가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했던 것을 비롯해, 일본 수상 하라 다카시 등을 면담하여 일제의 탄압·수탈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이 때문에 그는 항상 일제의 감시와 살해 위협을 받았다. 캐나다장로회 해외선교부는 그의 반일적 태도 등을 감안, 1920년 3월 세브란스 근무 계약기간이 만료되자 그를 귀국 조치했다. 
 

1958년 국빈자격으로 한국에 돌아온 스코필드 박사의 환영회.[사진=독립기념관 제공]


스코필드는 귀국길에 오르던 중 도쿄에 머물면서도 3·1운동 이후 일제의 동화정책과 민족차별정책의 철폐를 주장했다. 특히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헤론 스미스(Frank Herron Smith)가 일제의 식민통치를 옹호하는 글을 내자, '한국: 프랭크 헤론 스미스 목사에 대한 답변'이라는 반박글을 보내 스미스를 강력히 비난하기도 했다.

광복 후 한국의 친지들이 한국으로 돌아올 것을 권했으나 그는 건강 등 여러 사정으로 응하지 못하다가 지난 1958년 8월 국빈자격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그 후 서울대 수의과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고아원 두 곳과 직업학교를 후원했고, 영어성경공부반을 지도했다. 또한 3·1절 기념행사에 거의 매년 참여하고 3·1정신 계승에 대한 많은 글을 남겼다.

한국 이름 석호필(石虎弼)을 좋아하고 즐겨 사용했던 스코필드는 1970년 4월 별세했다. 앞서 정부는 1968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고, 그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한편 독립기념관은 그의 공적을 기리고자 별도의 공간을 마련, 관련 자료를 다음 달 1일부터 31일까지 전시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