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부터 삐끗한 신규 면세점…‘승자의 저주’ 내릴 수도
2015-12-31 08:16
HDC신라면세점와 한화갤러리아, 서둘러 가오픈은 했지만…
유커 등 외국인 관광객 집객 좌우하는 명품 유지 못해 전전긍긍
정부의 근시안적 면세점 정책이 부실 운영 부추겨
유커 등 외국인 관광객 집객 좌우하는 명품 유지 못해 전전긍긍
정부의 근시안적 면세점 정책이 부실 운영 부추겨
아주경제 정영일 기자 = #1. 지난 24일 서울 용산에 위치한 아이파크몰. 현대산업개발과 호텔신라가 합작한 '신라아이파크면세점'이 문을 열었다. 하지만 3만 3057㎡(1만평)에 달하는 면세점 공간 가운데 이날 영업을 시작한 곳은 전체의 60% 정도에 불과했다.
#2. 4일 후인 지난 28일 여의도 63빌딩. 한화갤러리아의 시내면세점 '갤러리아면세점63' 오픈 현장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다. 총 허가 면적의 60%만 개점했다. 층과 층 사이는 물론 1개 층 중에서도 일부 공간은 가림막을 치고, 여전히 공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HDC신라면세점과 한화갤러리아는 올해 유통업계를 뜨겁게 달궜던 서울 시내면세점 특허 쟁탈전에서 신규 사업자로 선정됐다. 사업권 획득 후 이들은 매장 구성을 위한 리모델링을 하는 등 면세점 형태를 갖추기 위해 사력을 집중했다.
하지만 정작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만한 명품 브랜드 입점에서는 완패했다. 외형만 면세점인 반쪽짜리 점포로 출범한 것이다.
실제로 먼저 가오픈한 HDC신라면세점이 운영하는 신라아이파크면세점은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심형 면세점’을 지향한다면서도 명품 빅 5로 불리는 ‘샤넬’이나 ‘에르메스’ ‘루이뷔통’ ‘까르띠에’ ‘불가리’ 등은 사실상 이날까지 입점을 확정 짓지 못 했다. 업계에선 루이뷔통을 제외하고 샤넬과 에르메스는 이 면세점에 상품을 납품하지 않기로 했다는 루머까지 퍼진 상태다.
‘갤러리아면세점63’은 상황이 더욱 안 좋다. 30일까지 입점을 확정한 명품류는 이태리 정장 브랜드 ‘스테파노리치’와 ‘코치’, 그리고 ‘파네라이’ ‘쇼파드’ 등 시계∙주얼리 4개 브랜드가 전부다.
국내 백화점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프라다’ ‘구찌’는 물론이고 중국인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MCM' 마저 물건을 내주겠다는 답변을 받지 못 했다. 시계류 중에서도 ‘오메가’와 ‘롤렉스’의 이름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결국 5개월의 시간이 흘렀지만 40%에 달하는 매장 공간을 채울 소위 명품 브랜드를 입점시키지 못하고 빈 공간으로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면세점에서 명품을 중심으로 한 상품 구색은 고객 유치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각종 설문조사 등을 종합하면 면세점을 찾는 대부분의 고객들은 할인 행사나 매장 분위기보다는 상품의 가격과 입점 브랜드 가치, 다양성 등에 큰 비중을 둔다.
실제 지난 2월 한국항공대학교 대학원 유수준 씨가 발표한 ‘면세점 선택 속성에 대한 소비자 중요성 인식에 관한 연구’이라는 석사 논문을 보면 면세점 선택의 가장 중요 요소로 판매 상품이라는 응답이 1위를 차지했다. 특히 면세점에서 판매되는 상품에선 가격과 브랜드의 다양성에 이어 럭셔리 브랜드의 수준은 빠지지 않는 중요 평가항목이 됐다.
그런데도 이미 국내 2위의 면세점과 백화점을 운영하고 있는 두 사업자는 이런 소비자의 욕구를 간과한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들은 “명품 없는 면세점은 앙꼬 빠진 찐빵”이라며 “졸속으로 면세점을 오픈하게 되면 기존 면세점에 대한 이미지마저 실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번 프리 오픈에 앞서 지난 22일 기자간담회를 열었던 한화갤러리아 황용득 대표는 “현재 해외 유명 명품 브랜드들은 현재 충분히 많이 출점해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며 명품 유치의 어려움을 에둘러 말했다. 중요 명품 브랜드들이 이미 소점포 전략을 고집하고 있는 상황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중소·중견 면세점이나 유통업 경험이 없는 두산의 경우에는 더욱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면세점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더욱이 명품 업체들이 현재의 5년짜리 시한부 면세점 특허 정책을 비관적으로 보면서 상품 판매를 주저하거나 포기하는 경향마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신규 면세점 업체들도 뚜렷한 해결 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명품 제품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중소기업 제품, 특산품 등을 전면에 배치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토속, 특산품 등은 점차 늘어나고 있는 사후면세점 판매 품목과 겹쳐,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앞서 지난 9월 안승호 한국유통학회장(숭실대 경영대학원 원장)은 아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정부의 면세점 사업자 선정은 '수학여행 기념품 판매점'을 뽑는 것이 아니다"며 "국산품 판로 개척도 중요하지만 외국인 관광객들이 구입하려는 상품을 (면세점) 구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정부가 근시안적으로 면세사업자 선정의 잣대를 들이댔다"고 질타했다.
이처럼 사면초가 상태인 신규 면세점을 두고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승자의 저주’라는 얘기를 하고 있다. 면세점 특허를 획득하기 위해 내건 수천억원의 사회공헌 공약 등을 지키기 위해서는 출혈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