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초대석] '대호' 최민식 "'김대호씨'는 기술상 아닌 신인상감"
2015-12-16 11:33
일제강점기, 박제 수집가인 일본군 고관 마에조노(오스기 렌)는 지리산의 산군(山君), '대호'의 가죽을 손에 넣으려 열을 올린다. 출세와 돈에 눈이 먼 조선인 출신 장교 류(정석원)와 구경(정만식)을 비롯한 조선인 포수집단이 이 검은 야욕에 힘을 실지만 아내를 잃고 늦둥이 아들 석(성유빈)과 단둘이 살아가는 지리산의 명포수 천만덕(최민식)은 협박과 회유에 휘둘리는 법이 없다.
"'호랑이 나라'로 불릴 정도였던 조선에서 호랑이가 어떻게 사라져 가게 됐는지 들여다보며 지금은 사라져버린 존재들과 삶의 방식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박훈정 감독의 말에 최민식은(사실 그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영화 관계자가) "호랑이가 나오는 영화? 그게 가능해? 한국에서?"라고 반문했다고 했다.
"6개월 동안 허공에 대고 총질을 하고, 소리를 질렀죠. 저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에요. 연기하면서도 어찌나 불안하던지… 존재하지 않는 상대와 연기해야한다는 부담감, 어색함은 말도 못 하고,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절망감이 몸을 짓누르죠.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열심히 하면 뭘 합니까. 호랑이가 고양이처럼 보이면 다 말짱 소용없는 일인데…" 그랬던 그는 이제, CG로 살아난 호랑이를 "김'대호'씨"라고 부르며 사람처럼 대했다.
"하지만 스크린에서 김'대호'씨를 만나자마자 눈물겹도록 고맙더라고요. 우리 CG팀에게요. 같은 팀인데 의심했다는 것도 미안했고요. 관객이 영화를 보고 만족하셨다면 그건 100% CG의 공입니다. 박수 쳐주고 싶어요. 우리 작품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국 영화의 기술력이 한 층 업그레이드된 것이니까요. 최민식, 정만식, 김상호가 아무리 연기 잘하면 뭐합니까. 김'대호'씨가 연기를 못 해버리면…우리는 다 서브예요. 우리 영화 주연은 김'대호'씨죠."
"저 혼자 연기하면서 처음엔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더군요. 없는 상대를 상상하며 연기할 때 가장 신경 쓴 점이요? 손가락? 하하. 경지에 오른 포수이기 때문에 호랑이가 다가올 때의 총 잡는 자세와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는 움직임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감정이 폭발하는 장면은 다행스럽게도 촬영 후반부에 많이 찍었어요. 그동안 작품의 질감, 캐릭터의 냄새가 몸에 상당히 배어서 좋은 장면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최민식이 연기한 천만덕은 일제강점기에도 요란스레 항일운동을 하지 않는다, 작은 다짐도 필요 없이 묵묵히 제 살던 대로 사는 것이 가장 강한 항일임을 보여주는, 기어코 굽히지 않는 우리의 민족성을 대변한다. '명량'에서 한국인이 존경하는 이순신 장군을 연기한 다음이다. 우리 민족을 표현하는 배우가 된 것에 대한 부담감을 물었다.
"대중이나 미디어, 같은 업계 사람들이 자연인 최민식 아닌 배우 최민식에 대해 과분하게 평가할 때, 감사하지만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하지만 그런 평가에서 자유로워 져야죠. 그래야 내가 살아요. 작품이 가진 메시지에 끌렸고 전력투구했을 뿐입니다. 이제 상투 안 틀어요. 2년 틀었으면 됐죠. 내년부터는 구두 신고 넥타이 맬 거예요."
'명량'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 자연스레 대화는 흥행으로 이어졌다. '명량'은 지난해 여름 개봉해 1761만5039 관객을 모아 한국 영화 역사상 흥행 1위에 이름을 올렸다. 최민식은 "언감생심"이라며 손을 내저었다.
"저도 인간인지라 개봉하면 바로 영화진흥위원회 사이트 들어가서 관객 수 확인해요. '오늘 얼마나 봤나. 경쟁작은 몇 명 봤데' 하면서요. 물론, 내가 하고 싶은 작업에 매진해 그것이 대중의 사랑을 받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죠. 하지만 이게 기준이 돼서는 안 되죠. 그럴 나이도 아니고요. 어느 정도는 편안해졌어요. 잘 차려진 한정식 한번 맛봤다고 그것만 먹고살 수 있나요. 그건 과욕이죠."
1989년 드라마 '야망의 세월'로 데뷔해 27년을 배우로 살았다. 광기에 사로잡힌 사이코패스부터(악마를 보았다) 내 옆에 있을 법한 평범함까지(파이란) 묵직한 무게감으로 폭넓게 아우른 그는 아직도 새로운 것을 갈망한다. 그의 욕심은 이런 것이다.
"이번 영화로 이렇게 또 제 역사가 또 기록되겠네요. 일기장처럼요. 더 새로운, 더 만지고 싶은, 더 건드리고 싶은, 더 끄집어내고 싶은 이야기에 대한 욕심이 매일 커져만 갑니다. 창작욕이라고 할까? 그런 것들이 점점 심해져요. 이제는 더 근사하게 작업할 수 있을 것 같고 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전에는 영화 하나 찍으면서 '이거 끝나면 쉬어야지' 했는데 이제는 부지런을 떨게 되네요. 물론 육체적으로 피곤하고 고되죠. 하지만 정신을 맑아져요. 욕심내려고요. 아주 나중에 저의 역사를 뒤돌아봤을 때 '내가 의미 있는 일을 했구나'하는 위안을 얻을 수 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