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의 꽃' 아웅산 수치, 고난 딛고 만개...미얀마 국민들, 빗속 밤새 환호
2015-11-10 14:42
1988년부터 미얀화 민중화의 산 증인
1988년 8월 26일 양곤. 아웅산 수치(Aung San Suu Kyi)는 수십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공포로부터의 자유'라는 역사적 연설을 시작했다. 그리고 27년이 흐른 2015년. 아웅산 수치는 미얀마(버마) 민주화의 가장 빛나는 이름이 됐다.
10일 아직 개표가 절반도 진행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의 단독 정부 구성이 사실상 확정되자 미얀마 전역은 축제 분위기였다. 개표 이틀째인 이날 전국 곳곳에서 NLD에 대해 90% 이상의 지지율이 나왔다. 집권 여당 통합단결발전당(USDP)의 구성원 대부분이 군인 출신인 만큼 미얀마 국민들 사이에 불신감이 팽배했던 탓이다.
NLD는 외국인 투자 규제 완화 등 경제 분야에서 개방 정책을 가속화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그러나 NLD 내부에서는 농민 보호가 우선이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 독립운동을 이끈 국부의 딸에서 민주화 투사로
아웅 산 수치의 아버지는 '버마의 국부'로 불리는 아웅 산 장군이다. 나라 이름은 1992년 군부가 버마에서 미얀마로 변경했다. 아웅산 장군은 버마의 독립투사로 영국과 일본의 무력 지배에 맞서 항쟁을 주도하면서 60여 년에 달하는 식민지 역사를 끝낸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1945년 출생한 아웅 산 수치는 두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인도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뒤 영국으로 넘어가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했다. 영국에서 직장을 얻고 영국인인 마이클 아리스와 결혼해 평범한 가정을 꾸렸지만, 1988년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미얀마로 귀국한 뒤 그녀의 인생은 일생일대의 전기를 맞았다.
1988년 민주화를 요구하며 일어난 8888 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이 군부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는 것을 목격한 수치는 정치 속으로 뛰어든다. 그녀는 야당과 민주 세력이 힘을 합친 민주주의민족동맹(NLD,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을 창설하고 의장을 맡는다.
그러나 아웅산 수치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한 군부에 의해 1989년에 그녀는 '가택 연금'을 당한다. 이후 군부는 무려 2010년까지 아웅산 수치에 대한 가택연금과 해제를 반복한다. 그럼에도 아웅산 수치는 1991년 노벨평화상 등 다양한 인권·평화상을 받았다. 이미 70대에 접어들었지만, NLD의 승리로 수치의 행보는 더욱 바빠질 것으로 보인다.
◆ 미얀마 현대사 장악한 군부…민주 세력의 최대 장애물
1948년 독립한 미얀마(버마)는 공산당과 소수민족 반란 등으로 혼란을 겪었다. 그 시기를 틈타 1962년 3월 네윈(Ne Win) 총사령관의 구테타로 군부 정권이 들어서고 이후 미얀마의 현대사는 '군부의 시대'로 점철됐다.
네윈은 국유화를 핵심으로 한 버마식 사회주의를 표방했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결국 1988년에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에 직면하게 됐고, 같은 해 네윈은 권좌에서 내려왔다.
민주화 운동에도 불구 1988년 다시 권력을 잡은 것은 국가발전평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였다. 당시의 핵심 멤버였던 탄 슈웨는 1992년부터 통치자의 위치에 올랐으며, 그는 이후 2011년 미얀마 연방공화국 체제가 출범하기 전까지 권력을 무려 20여년간 권력을 휘둘렀다.
2010년 11월 미얀마 군사 정권은 총선을 통해 민간에 정권을 이양했지만, 군부 지원을 받는 통합단결발전당(USDP)이 압승했다.
미얀마에서 군부정권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헌법으로 확보된 상하원 의석 25%뿐만 아니라, 내무, 국방, 국경경비 장관 임명권도 군부에 배속돼 있다. 이에 따라 군부 권력이 NLD의 가장 큰 과제가 될 것이라고 외신들은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