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전북비엔날레가 서예인들 체면 살린다”

2015-10-15 16:29
김병기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총감독 인터뷰

아주경제 최규온 기자 =“다 죽어갔던 한국 서예,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가 서예인들의 체면을 살리고 있다.”

국내 서예가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다. 이 짧은 한 마디는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이하 전북비엔날레)‘의 위상과 권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케 한다.

전북 서예는 송재 송일중(1632∼1717), 창암 이삼만(1770∼1847), 석정 이정직(1841∼1916), 벽하 조주승(1854∼1903), 유재 송기면(1882∼1959), 설송 최규상(1891∼1956), 석전 황욱(1898∼1993), 강암 송성용(1913∼1999), 남정 최정균(1924∼2001), 여산 권갑석(1924-2008)선생 등에 이르기까지 오래 전부터 탄탄한 서단을 형성해 왔다. 전북비엔날레의 토대가 그 어느 지역보다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다.
 

▲2015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포스터


인터넷 문명의 확산으로 ‘손 글씨’가 귀해지고 낯설어 지고 있는 시대, 긴 세월 깊이 잠들어 있던 우리의 ‘서예’가 오래 전부터 ‘예향’의 도시 전주에서 소리 소문 없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바로 전북비엔날레를 통해서 말이다. 올해로 자그마치 22년째,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트렌드가 속도전을 방불케 할 만큼 빠르게 변해가고, 하루가 머다 하고 새 것이 또 새 것으로 갈아입는 요즘 같은 세상에 전주에서의 서예는 강산이 두 번씩이나 바뀌도록 ‘비엔날레’를 통해 갈고 닦음을 멈추지 않고 있다.

옛 것은 무작정 구닥다리, 천한 것으로만 치부되고, 온통 물질이 주는 화려함과 상업성으로만 치장되고 있는 세상에 그토록 단순하면서, 무겁게만 여겨지는 ‘서예’가 전북비엔날레의 옷을 빌려 음지에서 양지로 더딘 걸음을 내딛고 있다. 전북비엔날레는 이제 ‘바람 앞의 등불’ 신세로 가물가물하던 한국 서예의 자존심이자 미래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전북비엔날레 시작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열정 하나로 산파 역할을 해 온 김병기 총 감독(전북대 중문학과 교수)을 만나 그의 얘기와 생각들을 정리해 보았다.

◇위상과 파급력 막강…지원은 생색내기 수준

“대한민국이 21세기 서예의 신 종주국이 되기 위해서는 이대로는 안 됩니다. 우리 전북지역에서라도 적극 나서야 합니다.”

김병기 총감독은 “21세기는 ‘문화예술의 시대’라고 너 나 할 것 없이 입버릇처럼 외쳐대고 있지만 마치 속빈 강정과도 같다”고 했다. 문화(예술)를 21세기 거대한 산업의 한 패러다임으로 인식한다면 정부나 관계당국의 보다 실질적인 지원과 관심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김병기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총감독


단적인 예로, 대한민국 국가 브랜드를 한 단계 끌어올린 ‘한류’ 바람도 온전히 개인(민간)의 노력과 투자에 의한 것이지 국가가 기여한 것이 무엇이 있었느냐고 김 총감독은 단도직입적으로 되물었다.

굳이 멀리 갈 것도 없다. 세계 유례없는 비엔날레로, 세계 최대 규모이자 권위를 자랑하고 있는 전북비엔날레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우선 예산만 놓고 보자.

올해로 10회째 격년제로 열리고 있는 전북비엔날레에 지금까지 지원된 예산이라고는 평균 고작 3억여원 안팎에 불과하다. 올해는 7억여원 정도로 그나마 나아진 편이다. 뒤늦게 시작한 광주비엔날레의 경우 첫해에 200억, 현재는 100억여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것과는 현격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상시 직원도 2명에 불과하다. 전문 인력 한 명 쓰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고 있다. 행사 때가 다가오면 수많은 출시 작품들에 대한 해석에서부터 가치 평가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김 총감독의 손을 거쳐야 한다.

전 세계 서예인들인 부러워하고, 명실공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행사 치고는 궁색하기 짝이 없다. 각 자치단체마다 생색나는 사업이나 행사에는 예산을 물 쓰듯 쏟아 붇는 것과는 확연히 비교된다.

중국 북경이나 부산·광주서예비엔날레 등은 모두 전북비엔날레의 성공 모델을 벤치마킹 한 사례들이다. 국내외적으로 ‘서예비엔날레’라는 이름의 전시행사도 다수 등장하고 있다. 그만큼 전북비엔날레의 위상과 파급력이 지대하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기증 받은 수작 970여점…엄청난 예술자산 보유

예산이 궁하다보니 김 총감독은 행사 때마다 세계 유명 작가들을 자신의 ‘얼굴을 팔아서, 안면으로’ 섭외를 하는 경우가 태반이고, 그때마다 피가 마른다고 한다.

행사가 끝나면 소장 가치가 있는 작품들을 기증 받는 경우가 많다. 지금까지 기증 받은 다양한 수작(秀作)들이 모여진 게

▲진승환 작 보우선사의 시 '진불암'(2015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기념 공모전 대상 수상작)

무려 970여점. 이처럼 짧은 기간에 이처럼 다양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뛰어난 작품을 확보한다는 게 결코 간단치 않은 일이다. 돈만 있다고 모을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단순히 물질적 가치로만 따지자면 이중 상당 수 작품들의 경우 지금 당장 경매시장에 나와도 3천~4천만원은 호가할 것이라 한다. 전북비엔날레 하나를 통해 전북은 단순한 가치로만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실물의 예술 자산을 보유하게 된 셈이다.

작가들의 혼이 담긴 작품들을 지금껏 보상비 한 푼 안 주고 공짜 기증을 받아 왔다. 김 총감독의 노력과 열정, 그리고 잘 닦아진 전북비엔날레의 위상 때문에 가능하긴 했지만, 그의 가슴 속에는 기증 작가들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늘 교차된다.

◇주옥같은 작품들 수장고에 방치…전용관 건립 시급

가장 큰 문제는 ‘전용관’이 없다는 것이다. 전 세계 유명 작가들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전북도립미술관의 비좁은 수장고에 방치되다시피 하며 아직도 뒷방 신세를 전전하고 있다. 도립미술관 측도 공간 부족으로 골치를 썩고 있긴 마찬가지다.

어렵게 모아진 작품들이 골칫덩어리로 변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는 게 지금 ‘예향 도시’의 맨얼굴이다. 문화관광부 ‘10대 우수 축제’라는 말도 무색해 진다.

“전용관 건립과 관련해 전북도와 의회 등에 수차례 건의도 하고 사정도 해보았지만 취지에는 모두가 공감을 하면서도 매번 허사로 돌아갔다.”고 김 총감독은 허탈해 했다. 그는 “전북비엔날레 정도의 브랜드라면 지방은 물론이고 국가 차원에서의 관심과 지원이 이루어질 만한 충분하면서 합당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국 서예계에서는 ‘전북비엔날레에 초대 받아야 비로소 제대로 된 작가 대접을 받는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라며 “일본 요미우리신문에서도 지난 8회 전북비엔날레 행사 때 3일 동안 심층 취재해 지속적으로 연재할 만큼 깊은 관심을 보였다.”고 했다.

중국이나 일본 등 대외적으로는 부러움의 대상인 전북비엔날레가 정작 본거지에서는 서자 취급을 받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는 얘기다. 김 총감독은 “동네 ‘송아지’는 항상 송아지 취급을 받는다.”고 빗대어 표현했다.

특히 1개월여에 걸친 전북비엔날레 행사 기간(10월17~11월15)이면 전주시내 대다수 전시공간이 비엔날레 작품으로 채워지는 탓에 전시공간을 마련치 못하는 여타 예술인들의 불만도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뒤늦게 서예비엔날레를 시작한 광주광역시는 700억원을 들여 전용관을 건립해 작품 상시 전시 등 다용도로 활용하고 있다. 김 총감독은 “부지만 확보된다면 50~60억 정도면 간소하게나마 전용관 건립이 가능하지만 관계당국과 의회 등에 수차례의 간청에도 지금껏 제자리걸음”이라고 씁쓸해 했다.

◇대중화 통해 엄청난 부가가치 창출 가능

아무리 뛰어난 보석일지라도 땅 속에 묻혀 있으면 한낱 돌덩어리에 불과하다. 마땅히 전시할만한 공간이 없다보니 행사가 끝나고 나면 보석 같은 작품들이 수장고에 고스란히 수장되고 만다. 김 총감독은 이를 거듭 아쉬워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대다수 일반인들에게는 빼어난 예술품들이 한낱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전북비엔날레는 일회성에 그치는 보여주기 행사가 결코 아니다. 본질은 서예의 ‘대중화’와 ‘실용화’의 연장성에 있다.
 

▲여태명 교수 등 서예 작가들이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행사에서 공동으로 가기 다른 서체를 선보이고 있다


서예는 지나치게 고루하고, 단순하면서, 정적(精的)인 예술이라는 일반의 오랜 고정관념을 깨고 서예의 내면에 잠재된 다양성과 실용성을 시대에 맞게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자는 게 전북비엔날레의 본 취지 가운데 하나이다.

실용성과 대중성 측면에서의 한 예를 들자면, 서예와 태권도와의 융합이다. 태권도는 이미 전 세계에 보편화돼 있다. 각 태권도장 벽면 등에 새겨진 ‘충(忠)·효(孝·)·인(仁)’ 등과 같은 문구를 통해 외국인들이 서예에 친숙해지고, 한편으로는 글 뜻을 통해 정신도 배울 수 있다. 격렬한 움직임 다른 한편에 ‘수신(修身)’을 익히는 것이다.

과잉행동장애자나 자폐자 등 장애자들 역시 서예를 통해 고도의 집중력과 언어를 습득하고, 이로써 정신·심리치료도 충분히 가능하다. 의대 정신과 등의 전문프로그램과 연계한다면 효과를 더욱 극대화할 수 있다. 관건은 아무리 훌륭한 명검(名劍)일지라도 누가,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김 총감독은 “서예 하나로 엄청난 부가가치 창출이 가능함에도 이를 적절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 매우 안타깝다”며 “중국이 과거의 문화적 상처에서 잠 깨기 전에, 일본이 왜곡된 서예 문화를 바로 세우기 전에 우리가 앞서 치고 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한국의 서예는 이미 중국을 넘어 섰고, 일본은 비할 바가 안 된다”며 “이렇듯 우수한 자원을 눈앞에 두고도 방치되고 있는 현실이 아쉽다.”고 했다.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예술 서예’ 재정립 필요

‘손 글씨’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엄청난 인류자산이다. 컴퓨터의 발달로 손 글씨가 사라지고 있지만, 서예는 단순히 서신(書信)의 수단에 머무르지 않는다. 김 총감독은 ‘서신 서예’는 컴퓨터에 넘기고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예술 서예’ 재정립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예향의 도시 전주에서 예술 서예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경우 부가가치는 대단히 클 것”이라며 “예술 서예의 쓰임새에 관한한 수많은 정보를 확보하고 있지만 쓸 곳을 찾지 못하는 점이 항상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했다.

그는 특히 국내 각 지방자치마다 중국인 관광객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는 요즘시대에 서예의 본고장 전북(전주)이야 말로 ‘서예 관광’ 유치에 관한 절호의 기회라고 비전을 제시했다.

중국인들은 서예를 모든 문화예술 장르 가운데 으뜸으로 여긴다. 애써 돈 들여 중국 관광객 유치에 고혈을 짜내기 보다는 있는 자산을 적제적시에 효율적으로 활용할 경우 효과는 기대 이상일 것이라고 김 총감독은 확신했다.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독립기념관 특별전시전


단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중국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한류스타의 서예 작품 전시도 한 가지 가벼운 방안일 수 있다. 서예는 또 중국 학생들에게 수행평가 필수 과목일 만큼 중요시 되는 분야다. 서예를 통해 중국 학생들 수학여행이나 방학을 이용한 탐방 유치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직까지는 서예에 관한한 낯설어 하는 서양인들에게도 그들의 취향에 맞게 얼마든지 접목이 가능하다고 김 총감독은 예상했다. 낯선 것이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역발상 전략과도 같다. 자주 접하다보면 익숙해지게 마련인 것이 인지상정이다.

김 총감독은 “우선 당장 시급한 문제가 서예 전용관을 마련하는 것”이라며 “전용관만 있으면 활용할 방법은 무궁무진하다.”고 전용관 건립에 대한 필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한편,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오는 17일부터 11월 15일까지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등에서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