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퇴진 당한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 '파란만장의 94년'
2015-07-29 00:00
아주경제 정영일 기자 = 신격호(94)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롯데 형제의 난'으로 불리는 신동주, 동빈 형제의 경영권 싸움으로 28일 일본 롯데홀딩스 대표이사에 사실상 해임됐다. 이로 인해 사실상 경영 2선으로 물러나게 됐다.
한국과 일본, 두나라에 재벌을 설립한 신 총괄회장은 그의 나이 만큼이나 삶도 파란만장하다.
1922년 경남 울산 삼남면 둔기리에서 5남5녀의 맏이로 태어난 신 총괄회장은 1941년 만 19세의 나이에 사촌형이 마련해준 여비를 갖고 일본에 건너갔다고 연합뉴스가 전했다.
신 총괄회장은 이 돈으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4년 도쿄(東京) 근교에 윤활유 공장을 세웠지만 미군의 폭격을 받아 가동도 못 하고 불타 버려 5만엔의 빚만 남기게 됐다.
일본이 패전하고 해방이 되자 친구들은 귀국을 권유해지만 신 총괄회장은 "나를 믿고 돈을 빌려준 사람을 모른 척할 수는 없다"며 다시 우유 배달을 하고 공사장에서 일해 사업자금을 마련했다.
1년 반 만에 빚을 다 갚은 그는 1948년 제과회사 롯데를 설립했고 미군이 주둔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 껌 사업 성공을 거둔다.
제법 큰돈을 만지게 된 그는 자본금 100만엔, 종업원 10명의 법인사업체를 만들고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이름인 '롯데'를 따 간판도 내걸었다.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전세계 20개국에 74개 계열사를 거느린 롯데그룹의 첫 걸음이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기발한 마케팅 기법으로 껌 사업에 성공한 그는 1961년 초콜릿 사업으로 눈을 돌린다. '제과업계의 중공업'으로 불릴 만큼 까다로운 초콜릿 제조를 위해 유럽에서 최고의 기술진과 시설을 들여와 다시 사업가로서의 수완을 발휘한다. 이후 캔디·비스킷·아이스크림·청량음료 등으로 영역을 넓히면서 종합 식품 메이커로 부상했다.
일본에서 사업을 일으킨 그는 한-일 수교로 투자의 길이 열리자 1967년 국내에 롯데제과를 설립해 모국에 대한 투자를 시작했다. 기업을 활성화해 일자리를 많이 만들고 세금을 많이 내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던 신 총괄회장은 이후 국내에서 다방면에 걸쳐 사업을 확장한다.
1974년 칠성한미음료를 인수해 롯데칠성음료를, 1977년 삼강산업을 인수해 롯데삼강을 각각 세우면서 국내 최대 식품기업의 면모를 갖췄다. 1973년에는 롯데호텔을 열어 관광산업 현대화의 기반을 마련했고, 1979년에는 롯데쇼핑을 설립해 유통 현대화의 토대를 구축했다.
1978년에는 평화건업사(현 롯데건설)를, 이듬해에는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을 인수해 건설과 석유화학 산업에도 진출했다. 식품-관광-건설-화학 등 진용을 갖춘 신 총괄회장의 롯데그룹은 1980년대 고속 성장기를 거친다.
롯데호텔은 1988년에 소공동 신관과 잠실 롯데호텔을 열고 88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는 데 일조했다. 세계 최대규모의 실내 테마파크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롯데월드도 관광 인프라에 대한 신 총괄회장의 소신과 열정이 빚어낸 작품이다.
이런 고속 성장에 힘입어 신 총괄회장은 1990년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억만장자 순위에서 9위에 오르기도 했다.
신 총괄회장은 1990년대 편의점(코리아세븐), 정보기술(롯데정보통신), 할인점(롯데마트), 영화(롯데시네마)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신 총괄회장은 차남인 신동빈 회장이 부회장으로 경영수업과 함께 실무를 맡은 이후에도 그룹의 주요 사업을 챙기면서 온라인쇼핑(롯데닷컴 설립)·SSM(롯데슈퍼)·카드(동양카드 인수)·홈쇼핑(우리 홈쇼핑 인수) 등까지 영역을 넓히면서 롯데그룹을 재계서열 5위에 올려놓았다.
이처럼 철저한 경영인으로 평생을 살아온 신 총괄회장은 고향과 고향사람을 살뜰하게 챙기는 인간다운 면모도 보여줬다.
댐 건설로 수몰된 고향마을 이름을 따 '둔기회'를 만들고 1971년부터 작년까지 매년 고향 사람을 불러 모아 마을 잔치를 열기도 했다.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 신준호 푸르밀 대표이사 회장, 신선호 일본 산사스 사장, 신정희 동화면세점 사장은 모두 그의 동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