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이 다락방에 숨겨서 보관했던 그림들..'거장 이쾌대' 50년만의 부활
2015-07-21 17:56
덕수궁미술관서 회고전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 관람은 무료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1940년대)은 그의 대표작이자 한국미술의 대표적인 걸작이다.
부인 유갑봉 여사가 그림들을 다락방에 숨겨서 보관했다. 이쾌대와 유갑봉 여사가 살던 신설동 집은 한옥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공간이 있었다. 이쾌대가 포로수용소에 수감될 때 갓난 아기였던 막내아들 한우(1950년 8월생)는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도 다락방에 숨겨진 그림의 존재를 모를 정도였다.
포로수용소에 갇혀있던 이쾌대가 편지를 보내, 자신이 돌아갈 때까지 그림을 팔아서 생활하라고 당부했지만, 유갑봉 여사는 어린 네 자녀의 생계를 어렵게 꾸려나가면서도 남편의 작품을 고스란히 지켜냈다고 한다.
광복 70년, 이쾌대가 다시 살아났다. 그가 타계한 지 50년만의 부활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광복 70년을 기념하여 20세기 한국미술 대표화가로 이쾌대를 선정하고 대규모 회고전을 연다.
22일 덕수궁미술관에서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전이 개막했다.
유족이 소장한 드로잉 300여점 중 150여점과 이쾌대가 그린 잡지 표지화, 삽화, '미술해부학', 미공개 아카이브 등 400여점을 선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 전시기획팀 김예진 학예연구사는 "이쾌대가 남긴 그림들은 대략 1930년에서 1950년 무렵까지 20여년에 걸쳐 제작되었다"고 설명했다. 이 시기는 일제강점기, 해방기 그리고 한국전쟁기로 한국 역사의 비극적 시대와 겹친다.
김 학예사는 "이쾌대는 바로 이 암울한 시대를 딛고 예술혼을 꽃피운 화가로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킨 식민지 시대에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주제로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확립했다"면서 "해방직후 좌익과 우익이 대립하며 사회전체가 혼란에 빠졌을 때 참았던 숨을 토해내듯 대작을 쏟아냈다"고 밝혔다.
1913년 경북 칠곡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이쾌대는 요즘으로 치면 '엄친아'였다. 서울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웠다.
학창시절 인물화를 주로 그리며 일본의 유명 전람회인 ‘니카텐’(二科展)에서 <운명>(1938)으로 입선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귀국 후에는 이중섭(1916~1956), 최재덕(1916∼?) 등 일본 유학출신 화가들과 함께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한국적인 감성의 세련된 서양화들을 선보였다.
그가 다시 주목된 건 해방 후였다. 해방의 감격과 역사적 사건을 주제로 한 <군상―해방고지>(1948)덕분이다. 40세에 월북하기 전 30대의 청·장년기에 그린 것이다. 길이 2m가 넘는 대작의 크기만큼이나 화단에 큰 충격을 선사하며 미술계 스타작가로 올라섰다. 홍익대학교 강사,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추천화가 등으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6.25전쟁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북한군의 선전미술 제작에 가담하게 되었고, 국군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북한으로 가고 말았다.
이번 전시는 휘문고보부터 제국미술학교 재학시절인 학습기(1929~1937), 귀국 후 신미술가협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미술을 시도하는 모색기(1938~1944), 그리고 해방 이후 탁월한 역량을 기반으로 한국적인 리얼리즘 미술세계를 구현한 전성기(1945~1953)로 나누어 이쾌대의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전시는 입체적으로 꾸몄다. 서양화가 김창열, 심죽자, 김숙진, 조각가 전뢰진 등 제자들의 인터뷰 영상 등을 통해 이쾌대의 따스한 인간애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전시기획팀은 "그동안 월북화가라는 이력 때문에 이쾌대라는 예술가를 온전히 만나고 이해하는 데에는 많은 걸림돌이 있었지만 이번 전시는, 그동안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던 그의 작품을 대면하고 그의 예술세계를 정당하게 평가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전시는 11월1일까지. 관람은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