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최초의 대형 지하 목곽고, 고령 주산성에서 발견
2015-07-14 09:51
이번 조사는 고령군(군수 곽용환)에서 대가야 역사복원을 위해 단계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고령 주산성 종합정비계획의 하나이다. 주산성은 6세기 전반에 축조된 대가야의 석축산성이며, 이번에 주산성의 내성(內城)에서 조사된 대형 목곽고는 6세기 중엽 경 백제의 축조기술과 도량형을 적용하여 축조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형 목곽고의 축조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무른 암반을 가로×세로 8m, 깊이 3.5m 정도로 파고 바닥에 약 1.2m 높이로 점토를 채운 다음, 중앙부에 약 20cm 두께의 목판들을 바둑판무늬의 격자(格子) 모양으로 짜 맞춘 정사각형 평면의 목곽공간을 만들었는데, 규모는 가로×세로 5m, 높이 2m 정도이다. 이후 암반을 판 구덩이의 가장자리에는 석축을 쌓고 석축과 목곽 사이에 1m 이상 점토를 두텁게 채워서 방수와 동시에 온도나 습도의 변화를 최소화했다. 이와 같은 구조적 특징과 산성 정상에 조성된 특수시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목곽고는 음식재료를 가능한 한 오래 보관하기 위한 저온 식자재 저장시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게 문화재청의 설명이다.
특히, 목곽고가 축조된 6세기 중엽 대가야의 정치적 상황은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에 대치하다 관산성 전투(554년)에서 패배한 후 세력이 급격히 약화하는 시점이다. 학계에서는 이 시기 대가야는 친백제 세력에 의해 정국이 주도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대가야 중심부에 백제 묘제의 영향을 그대로 받은 고령 고아리 벽화고분(사적 제165호), 고아2동 고분, 절상천정총(折上天井塚, 고령군 지산리 소재) 등 새로운 형태의 무덤이 축조된다는 점을 근거로 삼고 있다.
한편, 목곽고의 폐기과정은 대가야 멸망 이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최초 폐기층의 바닥에 소토(燒土, 불에 탄 흙)와 목탄의 흔적이 잘 남아있으며, 6세기 후엽 경의 신라 단각고배(短脚高杯, 짧은 굽다리 접시)편 등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목곽고는 신라가 대가야를 병합(562년)한 직후 다시 사용하지 못하도록 신라에 의해 의도적으로 불태워졌을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