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로칼럼] 동호문답…세상의 물음에 답하다

2015-05-14 11:20

윤창규 동아시아센터 회장 [사진= 동아시아센터 제공]

한강의 많은 다리 중 동호대교 근처에 조선 성종께서 폐허가 된 절간을 수리하여 독서당을 꾸미고 홍문관에 소속시켜 글 읽는 곳으로 삼은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이라는 곳이 있었다.

이곳에서 우리에게 구도장원공 (九度壯元公, 아홉번의 과거시험에 모두 수석함)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가 34세 되던 해 홍문관 교리로 동호독서당에서 사가독서(賜家讀書, 오늘날의 교수 석좌 제도)하면서 지은 글이 동호문답이다.

이 글은 16세기 당시의 시대상과 노출된 문제점을 해결하고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구현하기 위해 당대의 대학자 이며 정치가인 율곡이 제시한 방법론이다. 모두 11편으로 된 동호문답에서, 율곡선생은 “간특한 자를 물리치고 현명한 사람을 진출 시키는 일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오직 옛날의 폐단을 없애고 새로운 혜택을 베풀어 민생을 구하기 위해서이다”고 하였다.

오늘날 다시금 새겨도 귀감(龜鑑)이 되는 훌륭한 글이다.

하나의 문명이 정착하여 사물을 보는 눈이 확립되면 이에 비추어 인물을 품평하는 일은 생활의 일부이며, 인간성의 향상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특히 우리와 같이 유가적(儒家的) 분위기가 문화에 녹아있어 이미 생활의 일부가 된 바에야 더 이상 언급의 필요마저 없다 할 것이다. 민주 시민국가의 실현으로 청문회제도를 도입한 이후에는 더욱이 그렇다 할 것이다.

적절한 예가 있다.

명종이 승하한 후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은 예조판서에 제수 되었으나 관직에서 물러나려고 하였다. 퇴계의 은거에 대해 35살 아래의 율곡은 퇴계와 같은 대학자가 조정에 남아 여러 가지 역할을 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벼슬하는 사람은 원래 남을 위하는 것이지 어찌 자기를 위하는 것이겠는가!”라는 말로 퇴계가 남아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한 것이다. 그러나 율곡의 간절한 부탁에도 퇴계는 낙향을 하고 만다. 여러 비난이 있었지만 끝내 퇴계는 서울을 떠나 안동으로 내려간 것이다. 퇴계 자신은 조정에 참여하지 않고 물러나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를 기르는 것이 자신에게 합당한 의리(義理)라고 생각 한 것이다.

하지만 율곡의 입장에서는 정치현실이 자신의 뜻과 맞지 않는다고 하여 조정을 떠난다면 그것은 원로로서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그 역할을 담당할 수있는 사람이 현실 상황을 문제로 모두 떠나 버린다면 그 현실은 누가 바로잡을 것인가? 율곡은 당시 상황은 어떤 식으로 생각해 보아도 퇴계가 물러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퇴계의 현실 인식은 달랐다. 율곡은 현실을 문제 삼았으나 퇴계는 자신이 남아 있는다고 그 현실이 바뀌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고려해야 할 것은 자신의 행위가 의리에 합당한가의 문제였다. 퇴계로서는 출처(出處)의 문제를 의(義)를 기준으로 사고(思考) 하였던 것이다.

퇴계는 당시의 왜곡된 인심을 바로잡지 않고서는 임금에게 수기(修己)를 요구하는 것만으로 정치가 제대로 이루어 질 수 없다고 보았다. 퇴계의 태도는 학문과 인격수양을 통한 새로운 방식의 현실 참여만이 적극적 평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퇴계의 사퇴(辭退)는 치인(治人) 혹은 경세(經世)에 대한 무시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고려한 새로운 방식의 정치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율곡의 일관된 입장은 벼슬에 나아가 국가를 경장(更張)하는 것이다. 이것은 율곡이 수기를 치인에 앞서는 근본적인 것으로 인식하되 치인이 수기에 수렴되지 않는 독립의 영역이 있다고 보았던 것을 의미한다. 이른바 도덕의 영역과 정치의 영역이 구분된다는 인식이라 할 수 있다.

국가최고지도자의 인격이 완성되지 못하면 치인 혹은 치국은 불가능한 것인가? 율곡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임금이 비록 덕을 닦지 못했다 하더라도 치국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수기가 완성되지 않았더라도 치국은 도모할 수 있다. 그것은 임금 자신은 덕이 부족할 지라도 어진 신하의 도움을 받으면 치국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율곡은 한편으로는 임금에게 수덕을 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국가 경장을 위한 실질적 방안들을 탐구하였던 것이다.

퇴계가 인격 완성의 측면을 인륜 국가의 실현의 핵심으로 보았다면 율곡은 인격완성의 중요성을 인정하되 정치문제에 있어서는 국가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율곡은 도덕과 정치의 영역을 구분하고 정치문제의 해결을 위해 경세에 관심을 두고 민생을 위해서는 끝까지 노력하여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현실 참여와 진퇴의 문제는 섣불리 판단하기 어려운 최대의 과제이자 화두이다. 대학자이신 율곡과 퇴계에게 그 답을 여쭈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