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의 아트Talk]'비디오 돌탑' 국내 첫 토종 비디오작가 박현기

2015-01-26 20:10
서구기술에 동양사상 녹여내 독창적..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서 회고전

[비디오 돌탑'으로 불리는 박현기의 대표작인 1980년작 무제.]


아주경제 박현주 기자 = 돌의 영상을 담은 모니터가 실재 돌 사이에 끼워있다.  ‘그냥 돌’과 ‘모니터의 돌’은 서로 중첩된다. 무엇이 실재이고 무엇이 허상인지의 구별 자체를 모호하게 만든다. 마치 하늘에 뜬 달과 강물에 비친 달을 구별하지 못한 채, 강물의 달을 잡으려다 익사했다는 전설을 남긴 이백(701~762)의 정신세계 같다.

 1980년 9월 20일 파리시립현대미술관과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제11회 파리 비엔날레'에 출품된 이 작품(무제)은 그를 특별하게 했다.

 실재와 가상의 모호한 경계에 대해 언급한 이 작품으로 '비슷하다'는 세계적인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의 작품과 갈라지게했다.
 
 일명 '비디오 돌탑'으로 한국의 비디오아티스트로 등극했던 국내 첫 비디오 아티스트 박현기(1942~2000)다. 

 해외에서 뜬 백남준과 달리, 박현기는 국내에서 자생한 토종 비디오아트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백남준이 주로 외국에서 활동하며 1984년 한국을 드나들기 시작한 데 반해, 박현기는 1970년대 말부터 영상매체를 작품에 활용하며 독특한 비디오 작업을 펼쳤다.

 백남준이 TV등 미디어 영상매체와 친밀했다면, 박현기는 흙, 나무 등 한국적인 자연의 소재를 차용했다. 서구 미디어 기술에 동양 사상을 녹여내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했다. '비디오 돌탑'은 한국전쟁 당시 대구에서 피란민들이 현지 무태고개를 넘어가며 돌탑을 쌓는 모습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일본 오사카의 가난한 한국인 가정에서 태어난 박현기는 해방 이후 한국으로 건너왔다. 홍익대에서 서양화와 건축을 두루 공부한 그는 대구에서 인테리어 사업을 하며 번 돈으로 모니터를 사 작품활동을 했다.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74년 시작된 대구현대미술제에서다. 이후 1979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1980년 파리 비엔날레에 출품하면서 국제적인 시야를 넓혔다. 1980년대에는 일본에서 활약했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 비디오 아트에 대한 열풍이 일어나면서 주목받았다. 동경했던 백남준과는 교류를 이어나가 국내외에서 전시를 열 때면 때로는 상호 방문하기도 했다고 한다. 1997년 이후 '만다라'시리즈, '현현(顯現)' 시리즈 등 대표작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국내 비디오아트의 선구자로 각광받으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 갑작스럽게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국내외 개인전과 광주비엔날레 참여로 한창 왕성하게 활동하던중 58살이 되던 2000년 1월에 숨을 거두었다.
 
[ 박현기, 1979년 <물 기울기 퍼포먼스> 기록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이 국내에 비디오를 본격적으로 예술에 도입한 박현기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전시를 마련했다. 27일부터 5월25일까지 ‘박현기 1942~2000 만다라’ 전을 연다.

 1965년 학창시절 메모부터 2000년 임종 직전의 스케치까지 35년간 그의 인생과 예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과 자료 1000여점을 보여준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유가족에게서 작품과 자료 2만여점을 기증받아 2년에 걸쳐 정리한 전시다. 

 전시타이틀은 그의 대표작인 ‘만다라’에서 따왔다. 1997년 미국 뉴욕 킴포스터갤러리에서 열린 전시에 출품한 '만다라'는 수많은 포르노 사진을 합성해 성(聖)과 속(俗)의 모호한 경계를 언급한 작품으로 꼽힌다. 만다라는 우주의 진리를 표현한 불화(佛畵)를 말한다.

 동양과 서양, 자연스러움과 인공적인 것, 빛과 그림자 등 극적으로 대립되는 것들의 긴장이 만드는 에너지와 우주에 대한 명상적 사유를 작품에서 느낄 수 있다.(02)2188-6000
 

[1997년 6월 26일부터 7월 26일까지 뉴욕 킴포스터갤러리(Kim Foster Gallery)에서 열린 전시에 출품된 만다라 작품. 얼핏보면 완벽한 기하학적 도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수한 포르노 사진을 합성한 것이다. 성(聖)과 속(俗)의 모호한 경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