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허삼관’ 하정우 “감독과 주연 겸하게 된 얘기 좀 들어보실래요?”
2015-01-14 13:37
쉽지 않았을 작업을 마치고 관객과 만나기 위해 준비 중인 하정우를 13일 오후 서울 팔판동 카페에서 만났다. 항상 그렇듯, 유쾌한 에너지를 내뿜는 그에게 중국 위화 작가의 ‘허삼관 매혈기’를 각색하는 데 있어 무엇을 중시했는지 물었다.
“소설을 2시간짜리 영화로 만든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더라고요. 영화에서 허삼관의 심경이 전환되는 중요한 굿판이 등장하는데 사실 거기까지가 소설의 반이거든요. 빨리 지나야 했죠. 또 원작은 중국의 문화대혁명으로 시작해 여러 사건 뒤, 첫째 아들 일락(남다름)이를 위해 피를 팔기 시작하죠. 피 파는 아버지 이야기를 영화에 어떻게 녹여내느냐가 저에게는 관건이었어요. 그리고 굿판 전과 후를 하나로 만드는 것, 가장 어려웠죠. 그래서 새로 썼습니다.”
가족을 위해 피를 파는 ‘매혈기’만 원작에서 가져오고 후반부는 새롭게 구성했다. 문화대혁명 같은 정치적 배경은 빼고 휴머니즘에 집중했다. 전반의 유쾌하고 코믹한 부분들은 고스란히 살렸다. 일락이의 친부인 하소용(민무제)이 쓰러지는 신(scene)까지는 원작의 블랙코미디 그대로라고 하정우는 설명했다.
“위화 원작 그대로의 문체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소설만의 맛이 있었거든요. 그 문체를 살리려면 동화적인 느낌이 조화롭겠다고 생각했죠. 왜 하필 충청도냐고요? 충청도와 허삼관의 싱크로율이 잘 맞을 것 같았죠. 뭔가 보지 않는 듯하면서도 어느새 다 참견하는 그런 모습이요. 아, 왜 충청도 사투리를 쓰지 않았냐고요? 배우들이 질문하길래 ‘당신들은 이주민이다’라고 했어요, 하하. 대본 연습 때 충청도 사투리로 해봤는데 그냥 장난 같은 거예요. 그래서 한국전쟁 피난 후 이주한 주민들이라는 설정을 뒀습니다.”
상대방의 귀를 쫑긋 세우게 만드는 찰진 입담에 한참을 웃었다. 휴먼코미디영화 감독으로서의 감각이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감독과 주연을 동시에 맡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분명 하정우는 아직 마흔 전이다. “바로 3개월 뒤였는데, 위화 작가로부터 더 이상 판권 연장이 어렵다는 연락을 받으셨다는 거예요. 판권 계약이 몇 년 남았냐고 여쭸죠. 1년 안에 촬영만 들어가면 된다고 하시기에 1년 뒤 ‘군도’ 끝나고 하겠다고 받아들였어요. 감독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없다는 거예요. 곧바로 친한 감독들에게 전화를 돌렸어요, 친하지 않은 감독에게도요. 스케줄이 맞는 감독님이 한 분도 안 계시더라고요. 그러자 대표님이 ‘네가 할 수 있겠느냐’고 하시는데, 순간 명치를 세게 맞는 느낌이었어요. ‘롤러코스터’처럼 감독으로서 한 작품, 여타 영화들처럼 배우로 한 작품씩 해 나가려고 했는데 감독과 주연을 동시에? 심장이 뛰면서 ‘이건 내가 업그레이드될 수 있는 기회다. 삶에 있어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느낌이 왔죠. ‘롤러코스터’를 연출한 이유도 더 나은 배우가 되기 위해서였거든요. 영화계에 입문해 그 세계를 알고, 그 다음 단계로 진출하는 성과를 맛 봤어요. 너무 빠른 감독 겸 배우 제안에 당황했지만 ‘이건 넘어야하는 산’이라는 느낌이 들었고, 일단 대답을 보류한 채 그 자리를 마무리하고 집에서 곰곰이 생각했어요. 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요. 결론은 ‘하고 싶다’였어요.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죠.”
진중하게 말하던 하정우는 예의 유머감각을 뽐내며 연출 겸 주연의 시작 스토리를 마무리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절로 가고 싶어지는 단골집에서 새로운 모험을 결정한 하정우는, 이후 ‘허삼관’에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주연이자 감독이기에 자신의 연기에 객관성을 유지하도록 노력했다. 철저하게 준비했다. 전체 분량의 40%를 리허설로 촬영해 봤다. ‘누수’가 될 것 같은 부분들을 미리 체크했다. 촬영장소 헌팅을 직접 다니며 현장에서 바로 연기를 해봤다. 콘팅 작가와 연출 밑그림을 그릴 때도 몸소 연기로 설명했다. 그래서 콘티가 ‘찰지게’ 나왔다.
그렇게 힘들었던 프리프러덕션 단계가 끝나고 촬영에 들어갔다. 주연과 감독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사생활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날 촬영이 끝나면 퇴근인 배우와 달리 감독은 촬영을 마무리한 밤이나 쉬는 날이면 다음날을 준비해야 했다.
“배우로서의 경험과 정리된 철학으로 영화를 선택하고 관객들에게 보여드리는 능력이 배우의 자산이라고 생각해요”. ‘허삼관’이 다시금 상기시킨 깨달음이다. ‘롤러코스터’가 실험정신으로 만든 영화라면 이번에는 관객을 소통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배우 하정우와 감독 하정우를 하나의 연장선상에서 봐 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언젠가, 연기를 하고 모니터를 위해 돌아가는데 보고 있던 스태프와 배우들이 자리를 비켜 주더라고요. 그때 느꼈죠. 감독의 가장 큰 덕목은 ‘자리를 비워주는 것’이 아닐까? 콜라보레이션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모든 배우와 스태프가 자신의 역량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마련해 주는 것이요. 저는 미흡하니까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는 다 같이 만들고 다 같이 자기 영화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깨달음인 거죠. 당연히 가장 짜릿하고 뿌듯했던 순간은 모든 스태프와 배우들이 작품에 대해 애정과 애착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였어요. 똑같은 마음이 관객들께 잘 전달됐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관객들이 하정우, 하지원, 전혜진, 장광, 주진모, 성동일, 이경영, 김영애, 정만식, 조진웅, 김기천, 김성균, 민무제, 아역 남다름, 노강민, 전현석 군과 스태프의 진심을 느끼기를 희망한다.
중앙대 연극영화과 재학 당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카르멘’, ‘오델로’를 통해 연기를 시작했으며 지난 2002년 SBS 시트콤 ‘똑바로 살아라’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졸업 1년 후인 2005년, 중앙대 동문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에 출연하며 대형 배우의 출현을 알렸다. 날 것의 생명력이 넘치는 연기에 충무로가 주목했다. 윤 감독과는 ‘비스티 보이즈’,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군도: 민란의 시대’ 등의 작품을 함께했다.
하정우는 감독들과의 협업, 다양한 장르와 배역 속에 충무로 블루칩을 넘어 한국영화계 최고 배우 중 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박광춘(잠복근무), 이형곤(구미호 가족), 김기덕(시간, 숨), 김진아(두 번째 사랑), 임순례(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나홍진(추격자, 황해), 이윤기(멋진 하루), 홍상수(잘 알지도 못하면서), 김영남(보트), 김용화(국가대표), 권호영(평행이론), 전계수(러브 픽션), 이근우(577프로젝트), 류승완(베를린), 김병우(더 테러 라이브), 최동훈(암살), 박찬욱(아가씨)이 그에게 러브콜을 보낸 감독들이다.
다양성영화 ‘롤러코스터’로 감독 명함을 손에 쥔 그는 70억원 대작의 ‘허삼관’을 유려하게 연출하며 감독으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