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기고> 독립운동자금의 젖줄 백산상회
2014-09-11 17:41
일하는 엄마를 둔 죄로 평일에는 학원을 전전하고 휴일에는 컴퓨터와 함께 하루를 보내는 아이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간직했던 터라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아이들의 기대와는 달리, 목적지는 워터파크도 놀이동산도 아닌 백산기념관과 용두산 공원.
어리둥절해 하는 아이들에게 사랑의 빵 저금통을 가리키며,
"저 저금통에 너희들이 가진 용돈을 다 넣을 수 있어?"
"얼마나?"
"음... 한달, 두달, 아니 일년 용돈 전부?"
"그럼 나는 어떻게 해"
걱정스러운 눈망울로 대답하는 아이들에게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백산 안희제 선생 이야기를 꺼냈다.
1885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난 안희제는 1911년 러시아 망명 등을 거쳐 1914년 귀국한다. 망명 중 독립운동가들과의 만남을 통해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경제적 뒷받침이 가장 시급함을 알게 된 그는 국내로 돌아와 전답 2천여 마지기를 팔아 독립운동지원 자금마련을 위해 백산상회를 설립했다.
소규모 개인상회였던 백산상회는 1917년 10월 합자회사를 거쳐 1919년 5월 주식회사로 거듭 성장해 독립운동의 재정적 기반을 확장시켜 나갔고, 기업운영을 통해 발생한 이익금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창출했다.
또한 이에 그치지 않고 후학 양성을 위한 기미육영회를 설립하여 유능한 인재를 해외 유학생으로 파견하는 사업은 물론 동아일보 창간 발기에 참여하고 민립대학기성회와 협동조합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남형우, 서상일, 김동삼과 함께 비밀결사단체인 대동청년단을 결성하고 2대 단장을 지내기도 했다. 국내 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위한 발해농장을 경영하고, 민족종교인 대종교에 귀의하는 등의 많은 업적을 남겼다.
백산상회 건립 100주년을 맞아 아이들과 함께 언제나 민족의 먼 장래를 바라보면서 현재를 다지고 연마했고, 일제의 고문으로 돌아가시던 마지막까지 “가사든 국사든 오직 자력을 중심으로 해야한다.”는 유언을 남기셨던 독립운동가 안희제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부산 중구 동광동의 옛 백산무역주식회사 건물 자리에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백산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그곳에서 안희제 선생의 일대기와 독립운동관련 자료를 보고, 첩보작전을 위해 소나무 밑에 구덩이를 파서 비밀리에 통신문을 교환하였던 자리에 세워진 안희제 선생의 흉상도 찾아보았다.
100년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는 선생의 나라사랑을 깊이 되새기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과 선열들의 나라사랑정신을 이어갈 다음 현충시설 탐방 여행을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