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샤오핑 탄생 110주년] 우리사회에 던지는 덩샤오핑의 메시지
2014-08-21 15:08
덩샤오핑 과거 발언들 재조명받아
◆과거사 정리와 국민화합
덩샤오핑이 1978년 정권을 잡은 후 가장 처음 한 일은 과거사 정리였다. 마오쩌둥(毛澤東)과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는 난제였다. 문혁을 긍정하고 개혁개방을 추진할 수는 없었다. 또한 당시는 좌우 이념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문혁시절 마오로부터 박해를 받았던 이들은 격하게 마오의 노선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기득권층에서는 마오의 명예가 손상되어서는 안된다고 맞섰다. 마오의 정책을 계승하면 개혁이 불가능해지고, 마오를 격하하면 국론이 분열되고 국가가 혼란으로 빠질 상황이었다.
덩샤오핑은 "지난날의 과실을 모두 마오쩌둥 한 사람의 잘못이라고 볼 수는 없다. 마오쩌둥이 없었다면 새로운 중국도 없었다. 마오는 공(功)이 7할이고 과(過)가 3할이다"고 말했다. 이어 덩샤오핑은 "톈안먼 광장에 마오쩌둥 초상화가 영원히 걸려 있을 것"이라고 존중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 나서 개혁개방 정책을 내놓았다. 중국이 마오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개혁개방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흑묘백묘로 이념논쟁 빗겨가
1978년 덩샤오핑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과 '아랫목이 따뜻해지면 윗목도 자연스럽게 따뜻해진다'는 '선부론(先富論)'을 설파하며 개혁개방에 시동을 걸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자본주의를 배격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덩은 흑묘백묘론으로 이념논쟁을 빗겨갔고, 성장이냐 분배냐의 논쟁은 먼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선부론으로 돌파했다. 선부론은 부자가 돼야 나누어 줄 것이 생기기 때문에 우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이론이다. 그는 "가난이 공산주의가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국식 사회주의 비전제시
덩샤오핑은 1985년 8월 핵심당원들에게 "우리의 원칙은 마르크스주의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중국만의 독특한 길을 가자는 것이고, 우리는 이것을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건설이라고 부른다"라고 말했다. 중국특색 사회주의라는 슬로건은 과거를 존중하는 동시에 미래비전을 제시했다. 덩샤오핑은 "부자가 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라며 사회주의 사상에 매몰돼 있던 인민들의 인식변화를 촉구했다.
◆도광양회와 유소작위
동유럽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소련이 해체되던 1990년 중국사회에는 불안감이 감돌았다. 당시는 톈안먼 사태가 일어난 다음해이기도 했다. 덩샤오핑은 흔들림없이 국가의 비전을 제시했다. 덩샤오핑은 "냉정하게 관찰하고, 최전선을 튼튼히 하며, 침착하게 대응하면서도 능숙하고 우직하게 행동해야 한다"면서 "지금 절대 우두머리가 되어서는 안되니 도광양회(韜光養晦ㆍ 재능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린다)하면서 유소작위(有所作爲ㆍ필요할 때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하라"고 말했다. 도광양회와 유소작위는 아직까지도 중국 외교가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념논쟁 논리로 제압
시장경제 도입이 급물살을 타면서 중국 내부에 중국이 완전히 서구식 자본주의 사회로 가는 것 아니냐는 국가정체성에 대한 논란이 고개를 쳐들었다. 1990년12월24일 덩샤오핑은 당간부들과의 회의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구분은 계획경제이냐 시장경제이냐에 있지 않다. 사회주의에도 시장경제가 있고, 자본주의에도 계획경제가 있다. 시장경제를 도입한다고 해서 우리가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다고 여기지 마라. 우리가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개혁개방을 추진하라"고 다잡았다.
◆거인의 일갈, 남순강화
톈안먼사태 이후 국제여론이 악화됐고, 외국자본이 중국으로부터 철수하기 시작했다. 보수파들의 발언권이 커졌으며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은 주춤하게 된다. 1992년 덩샤오핑은 88세의 노구를 이끌고 남부지방 순시에 나섰다. 그는 남부지방을 돌며 다시 한 번 개혁개방을 외쳤다. 당시 발언들은 '남순강화(南巡講話)'라고 불린다. 그는 "개혁개방 정책을 수행할 때 우리가 우려해야 할 것은 다급함이 아니라 주저함이다. 국가는 이 정책이 필요하고 인민은 이것을 좋아한다. 누구든 개혁개방 정책에 반대하는 자는 바로 물러나야 한다"고 일갈했다. 이후 주춤하던 개혁개방 정책에 다시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파격적인 인재등용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을 가장 잘 실현해내고 구체화시킨 인물로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가 꼽힌다. 주룽지는 경제운용의 천재라고 불리며 일찌기 재능을 인정받았었다. 하지만 직선적이고 독단적인 성격으로 당내에 비토 세력이 있었다. 덩샤오핑은 주룽지의 재능을 아꼈고, 주룽지가 중국의 발전을 가속화시킬 인재라고 여겼다.
그리고 1992년 10월 공산당 당대회에서 당시 후보위원이었던 주룽지를 중앙위원, 정치국위원을 뛰어넘어 곧바로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시켰다. 당내 서열 200위권 바깥이던 주룽지가 일약 서열 5위로 뛰어오른 것. 덩샤오핑의 이같은 결정에 대해 많은 당내 반대목소리가 일었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정치국회의에 참석해 "나는 경제를 모른다. 다만 듣고 이해할 줄만 안다. 하지만 주룽지는 경제를 안다"며 "주룽지는 당성이 강하고 경제를 알며 창의력 가득하다. 이같은 인재는 드물다. 일부 동지들은 편견을 거두라. 당을 부강하게 할 간부가 바로 눈앞에 있다"고 말하며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고, 주룽지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한중수교는 중국에 유익무해"
1992년 한·중 수교 당시 중국 의 외교부장이었던 첸치천(錢其琛) 전 중국 외교담당 부총리는 회고록에서 덩샤오핑은 줄곧 한중관계 정상화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고 소개했다. 1985년 4월 덩은 한중관계를 언급하면서 "중국과 한국의 관계 발전은 우리에게 필요하다" 고 말했다. 돈을 벌수 있어 경제적인 측면에서 장점이 있으며 한국이 대만과 단교하기 때문이었다. 덩샤오핑은 "한중수교는 중국에 유익무해(有益無害)하다"고 말했다.
1981년 김일성을 만난 덩샤오핑은 그에게 "분열돼있는 1개 국가의 상태는 빨리 해소돼야 한다. 하지만 남북한 통일은 10년안에 이뤄질 수 없으며, 100년만에 이뤄질 것이라는 생각으로 점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덩샤오핑은 신중한 접근을 강조하면서 "(김주석이 제창한) 연방형태의 통일은 남북 쌍방사회의 제도를 바꾸지 않으면서 통일을 추진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1987년 다시 김일성을 만난 덩샤오핑은 "이제 개혁개방해야 한다. 김 주석은 선전에 가보았는가. 다음 기회에 꼭 가 보길 희망한다. 선전에서는 이제 기술력이 좋은 제품이 생산돼 국제시장에서 팔리고 있다"고 북한의 개방을 촉구하기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