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세 별세.'하모니즘' 창시 김흥수 화백은 누구인가
2014-06-09 10:54
아주경제 박현주 기자= “1993년 러시아에서 푸시킨 미술관에서 전시하는데, 관람객들이 당신 작품을 보니 저 작품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해요. 그 미술관에 보니 러시아 미술 소장품과 인상파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더군요. 불란서 사람들과 러시아 사람들이 먼저 느껴준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내 작품에 대해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요즘 외국작가들 작품이 대단하다 하는데 비교 전람회를 했으면 좋겠어요. 내 작품하고….”
2010년 92세의 김흥수 화백은 욕심이 여전했다. "자신이 그림에 있어서는 최고"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는 당시 어떤 작가와 대결을 했으면 좋겠냐는 질문에도 거침없었다. “생존한 작가든 작고 작가든 외국작가든 국적·성별을 초월해 누구든 자신있어요.”
그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9일 오전 3시 15분쯤 김흥수 화백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김 화백의 유족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지만 편안하게 가셨다"고 전했다.
김흥수 화백은 1년 전 만났을 때 휠체어 의자에 앉아 손님을 반갑게 맞이했고 여전히 스타처럼 사인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었다. 당시 "장수현이가 보고 싶다. 산소에 한번 같이 가보자"고 했을 정도로 부인에 대한 그리움이 커져 있었다.
'하모니즘 창시자' '한국의 피카소'로 불리며 미술계의 화제인물이었던 김 화백의 마지막은 쓸쓸했다.
2012년 42세나 차이 나던 부인 장수현 김흥수미술관장이 먼저 세상을 떴다. 서울 평창동에 건립한 김흥수미술관도 경제적인 사정으로 처분했다. 고 장 관장과 영재미술학원을 운영하며 그의 그림 '하모니즘'을 계승하는 곳이기도 했다.
'하모니즘'은 1977년 김흥수 화백이 창시한 화풍으로, 여성의 누드와 기하학적 도형으로 된 추상화를 대비시킨 그림으로 추상과 구상이 한 그림 안에 들어 있다.
1년 전 안부가 궁금하던 김흥수 화백은 한 갤러리에 모습을 드러냈었다. 장수현 관장 1주기 추모 기념으로 장수현 관장 개인전을 열고 기자들과 만난 김 화백은 "생전에 우리 장수현 관장이 나한테는 작품을 통 안 보여줘서 이번에 처음 봤는데 걸어놓고 보니 아까운 사람이 너무 일찍 떠났구나 싶다”며 회한 가득한 모습을 보였었다.
그는 미술계의 '강한 남자'의 전설로 숱한 화제와 염문을 뿌리며 자신의 그림처럼 화려한 인생을 살았다. 트레이드 마크는 하얀 턱수염과 깃털 달린 중절모. 국내 미술계의 '멋쟁이 화가'였다.
1940년부터 그려온, 시대를 앞선 누드화는 풍기문란이라는 이유로 전시장에서 철거되기도 했지만 1985년 대한적십자 창설 85주년 기념 벽화를 누드화로 제작해 이제는 평화를 상징하는 작품으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베푸는 삶을 살겠다”는 노화백. 2006년 제주도에 작품 20여 점을 기증했다. 작품 가격만 100억 원대다.
학연에 얽히고 설킨 화단을 향해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던 ‘폭군 화가’, ‘고함쟁이 영감’으로도 불렸다. 특정한 그림을 그리면 대통령상을 주겠다는 유혹도 뿌리친 ‘다혈질·고집불통’ 화가였다.
예술에 대한 열정은 고무줄처럼 질겼다. 두 번의 백내장 수술과 세 번의 척추 수술이라는 커다란 진통을 겪고도 미수(米壽)의 나이에 ‘춘화 드로잉’을 선보이기도 했고, 2010년 대규모 회고전을 열고 작품을 과시했었다.
"시력은 찌글찌글하지만 감각은 아직도 녹슬지 않았다”며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던 고 김 화백은 2년 전만해도 인물을 앞에 두고 목탄 드로잉을 그리는 듯 손의 감각을 자랑했었다.
1919년 함흥에서 태어난 김 화백은 화가가 되는 걸 펄펄 뛰며 반대했던 아버지에게 “미술학교를 보내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악을쓰며 뛰쳐나와 화가의 길을 택했다.
1940년 동경미술학교에 수석 입학했고 6·25전쟁 중 종군화가로 일했다. 1967년 미국 필라델피아대학에 초빙교수로 갔을 때 우연히 추상화와 구상화가 함께 놓인 것을 보고 '이거다' 했고 1977년 추상과 구상이라는 상이한 화면을 하나로 조화시킨 '하모니즘 미술'을 개척했다. 한국화가로는 최초로 살로·또논드 정회원·서울 미대 교수와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했고 세계적인 미술관에서 수많은 초대전을 가졌다.
'화단의 이단아'로 불리며 관례를 깨고 새로운 문을 열어젖힌 김흥수 화백은 생전 "예술은 감동하라고 해서 되는 게 아니야. 절로 감동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했다. 미술계 후배들에게도 했던 조언이 아직도 생생하다.
“새롭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새로운 변화에 두려워하지 말라.”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