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도시를 읽다(6)] 현대차가 선택한 인구 3000만명 '충칭'
2014-04-02 07:14
3000여년전 상(商)·주(周) 시대 고대왕국 파국(巴国)의 도읍지였던 충칭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충칭은 예로부터 창장(양쯔강)과 자링강이 합류하며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여 지어진 요새라는 뜻으로 ‘산수지성(山水之城)’이라 불렸다. 항일전쟁 당시 일본군에 패한 국민당정부가 충칭으로 수도를 옮긴 것도 험한 산세를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60년대 냉전 당시 마오쩌둥 주석이 미국 소련의 군사공격에 대비해 ‘제3선 건설’을 추진하며 연해지역의 군수ㆍ화공ㆍ철강 등 산업 시설을 충칭으로 옮긴 것도 같은 맥락이다.
탄탄한 중공업을 바탕으로 충칭은 70년대 안정적인 경제발전을 이어갔다. 하지만 쓰촨성에 편입돼있던 충칭시 경제성장에는 한계가 있었다. 충칭시가 벌어들인 세수의 대부분은 쓰촨성 성도인 청두에 집중됐으며, 개혁개방 이후 상하이 등 동부 연해지역에 발전이 집중되면서 충칭시는 중국 고속경제성장에서 소외됐다.
노후 공업도시인 충칭에 다시 한번 봄날이 찾아온 것은 1997년 중국 정부가 충칭과 주변지역을 묶어 직할시로 승격시키고 전폭적인 지원을 하면서부터다. 여기에 1997년부터 싼샤댐 개발로 창장이 '황금수로'로 변모하면서 충칭도 고속 성장가도를 달렸다.
싼샤댐 건설로 수심이 깊어진 덕분에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1만t급 선박 운항도 가능해지면서 충칭은 창장 물류의 핵심기지로 부상했다. 충칭 수상교통로의 심장부인 차오텐먼(朝天門) 부두에는 창장 물줄기를 따라 상하이~충칭을 오가는 대형 선박과 컨테이너선으로 하루종일 붐빈다. 창장 뱃길이 상하이~충칭 간 철도 8개 노선과 맞먹는 물동량을 처리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를 기반으로 충칭시는 서부 내륙의 풍부힌 지하자원을 충칭에 모아 선적하고, 상하이 등 동부 첨단 제품이 서부 내륙으로 들어오는 중국의 물류 허브로 자리잡았다. 여기에 ‘현대판 실크로드’라 불리는 중국 충칭과 독일 서부 뒤스부르크를 잇는 총 거리 1만1000km의 위신어우(渝新毆)가 개통돼 충칭은 유라시아 교두보 역할도 하고 있다.
지난 2010년 국가급 개발구로 지정된 량장(兩江)신구는 충칭시 경제 현주소다. 이곳은 자동차ㆍ 전자 IT 산업 기지로 향후 10년간 중국 서부 내륙경제 발전을 이끌 견인차다. 80년대 선전, 90년대 상하이 푸둥, 2000년대 톈진 빈하이 신구가 있었다면 2010년부터는 량장신구가 중국 경제 발전의 중심이 되고있다는이야기다. 량장신구 출범후 3년간 이곳에 입주한 세계 500대 기업 수는 초기 54개에서 118개로 늘어났다. 량장신구는 오는 2020년까지 1억 위안의 경제규모를 갖춘다는 계획이다.
최근엔 IT 산업도 자동차 산업을 대체할 정도로 무서운 기세로 발전하고 있다. 충칭에는 휴렛팩커드, 에이서, 시스코, 폭스콘 등이 입주해있다. 충칭은 지난 2011~2015년 5년간 IT산업에 총 3000억 위안을 투자해 매출액 1조 위안을 실현해 중국 전체 IT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현재 1.5%에서 10%까지 높인다는 계획이다.
충칭은 우리나라에서도 '보시라이 스캔들'로 유명세를 탔다. 보시라이는 충칭시 당서기로 집권한 2007년부터 경제발전뿐만 아니라 도농 지역 격차 해소를 강조하며 호구제도 및 사회복지 개혁, 공동 임대주택 건설 등 ‘공동부유론’에 입각한 ‘충칭모델’을 실험했다. 경제 효율성을 강조하는 ‘광둥모델’과 달리 부의 재분배와 형평성을 강조한 것이다. 실제로 보시라이는 사회복지ㆍ주거ㆍ의료 등 분야에서 주민 삶의 질을 개선시키면서도 충칭을 성장률이 10%가 넘는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경제개발에 힘입어 충칭은 이제 서부 내륙지역의 소비 중심도시로 부상하고 있다. 지난해 충칭시 전체 소매판매액은 전년보다 14% 증가한 4511억7700만 위안으로 베이징ㆍ상하이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충칭시 최고 번화거리인 제팡베이(解放碑)에는 루이비통ㆍ구찌ㆍ오메가 등 명품샵이 즐비하다. 보시라이는 몰락했지만 충칭모델을 기반으로 한 충칭시 경제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