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을 알아야 중국이 보인다-3> 목소리 커지는 中 공산당 외교

2012-10-18 14:50

19세기 중엽부터 한 세기 동안 '동아시아의 병자'로 불렸던 중국이 지난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초고속 성장을 거듭하며 21세기 국제무대에서 이제 미국과 비견할 만한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지난 2009년 4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G20 세계금융정상회의에 참석한 후진타오 중국 국가 주석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미중 정상회담을 가지고 양국 간 협력방안을 논의했다. [런던=신화사]
아주경제 배인선 기자= “중국은 결코 패권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며 패권적 방식으로 행동하지도 않을 것이다. 중국의 발전은 평화로운 세계에서 이루어 질 것이며 세계 평화를 보호하는 것은 중국의 발전을 통해서다.”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 9월 21일 제9차 중국-아세안 엑스포 개막식 연설>

“중국의 주권과 영토를 지키기 위해 자주독립적이면서도 평화적인 외교정책을 사용하고 있다.” <원자바오(溫家寶) 국무원 총리, 9월 29일 중국 건국 63주년 중국 국경절 리셉션 축사>

중국 공산당이 그 동안 표방해온 대외정책 기조는 이처럼 평화공존과 자주외교다. 이는 지난 1956년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발표한 평화공존 5원칙, 즉 ▲영토의 보전 ▲주권 상호존중과 상호불가침 ▲내정불간섭 ▲호혜평등 ▲평화공존에 기초한 것이다.

중국 공산당 외교정책의 근간인 평화공존 5원칙은 시대와 국제정치 변화의 흐름에 따라 전략적으로 변화를 거듭해왔다.

▲ 친소일변도->반미반소->연미반소

미국과 소련을 축으로 한 전 세계 냉전 체제 아래에서 마오쩌둥(毛澤東) 시기 외교 정책은 ‘반대’에 초점이 맞춰졌다. ‘반제국주의’ ‘반패권주의’ 등 ‘반(反)’자 행렬이 줄을 이으며 혁명투쟁의 의지를 불태웠다. 당시 중국의 외교정책은 주로 혁명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좌우됐다.

정권 수립 직후인 49년에서 1950년대 말까지 중국은 공산주의국가 라오다거(老大哥)인 소련에 의존하는 친소일변도(一邊倒) 정책을 취했다. 이를 통해 대내적으로 소련으로부터 군사·기술적 원조를 받으며 기나긴 국공내전 이후 피폐된 국가의 안정을 꾀하고 대외적으로 소련과의 동맹을 통해 반미를 외치며 세계 공산혁명 활동을 지원했다.

그러나 1950년 말부터 중·소 양국은 이데올로기에서 대립하고 국경 충돌사태까지 겹치며 관계가 악화됐다. 중국은 ‘반제국주의’ ‘반수정주의’를 외치며 미소 양대 패권주의에 반대하고 독자노선을 걸었다.

특히 1960년대 당시 중국은 문화대혁명 발발로 외교정책에 대혼란을 겪었다. 중국의 외교정책은 혁명 사상의 대외 선전에 초점이 맞춰졌으며, 해외 주재 대사 소환 숙청, 홍위병의 소련 영국대사관 난입 등 외교적 상식을 깨는 비신사적 행위로 결국 국제사회에서 외교적 고립을 초래했다. 부룬디·튀니지·가나·인도네시아 등 일부 국가는 중국과 단교를 선언했다. 이 때 중국 외교는 가장 힘든 시절을 겪었다.

1969년엔 국경지역에서 소련과 유혈 충돌이 벌어지면서 소련은 중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주적이 됐다. 특히 소련이 나날이 세력을 팽창해 나간 반면 미국은 월남전에서 패전하며 세력이 위축됐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중국은 핑퐁외교, 닉슨 대통령의 방중, 미·중 수교 등을 통해 미국과 연합해 팽창하는 소련에 반대하는 연미반소(聯美反蘇) 정책을 취했다. 이는 중국이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에서 벗어나 자본주의 종주국 미국과 손잡은 것으로써 중국 개혁개방의 토양을 제공했다.

▲ 도광양회->유소작위->화평굴기->?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이 집권하고 ‘죽의 장막’이 걷어지며 중국의 대외정책 노선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그 동안 혁명과 이데올로기를 중시하던 태도에서 자국의 이익을 강조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외교정책을 취하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은 혁명과 전쟁이 아닌 평화와 발전이 시대적 조류라고 판단했다. 중국은 대외적으로 불필요한 견제와 간섭을 피하고 내부적으로 모든 역량을 경제개발에 쏟아 붓기 위해 ‘어둠 속에서 힘을 서서히 기른다’는 도광양회(韜光 養晦)를 대외정책의 기본으로 내세운다. 도광양회를 외교노선으로 처음 명명한 것도 덩샤오핑이다. 그는 1989년 6월 4일 톈안먼 사건 이후 중국에 대한 서방세계의 인식이 악화되자 때를 기다리며 힘을 키우라는 도광양회를 강조했다.

덩의 뒤를 이은 장쩌민(江澤民)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르되 ‘필요한 역할은 한다’는 유소작위(有所作爲)를 외쳤다. 지속적인 개혁개방으로 어느 정도 대내외적 위상을 갖춘 중국은 냉전체제 종식 아래서 조금씩 국제사회에서 목소리를 내고 여러 국가와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등 전방위 외교에 나섰다. 중국은 1991년 베트남·인도네시아와, 1992년엔 우리나라·싱가포르·브루나이와 수교했다. 또 러시아·프랑스·일본·영국·프랑스·캐나다·인도·멕시코·브라질 등과 다양한 차원의 ‘동반자관계’를 맺기에 이른다. 중국이 상하이협력기구(SCO)의 전신인 ‘상하이-5’를 창설하고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등에 얼굴을 내민 때도 바로 이 시기다.

2000년대 후진타오(胡錦濤)를 중심으로 한 4세대 지도부 체제에 들어서 중국은 경제·군사·외교 등 다방면에서 급부상하는 배경 아래서 ‘책임있는 강대국’으로서 화평굴기(和平屈起, 평화로운 굴기)를 제창했다(‘굴기’라는 단어가 주변국에 위협적이라는 판단 아래 2004년부터는 ‘발전’이라는 말로 대체됨).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실력을 행사하며 기후변화, 테러척결, 북핵문제 등 글로벌 이슈 해결에 있어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 발발 이후 미국의 패권이 흔들리면서 중국은 세계 2위의 경제력을 가진 G2로 성장해 아시아와 세계무대에서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행보를 시작했다.

중국 기업들은 전세계를 휩쓸며 투자하고, 라틴아메리카·아프리카 등 해외에서 자원 광폭외교를 펼치고 있다. 또 위안화의 국제화를 내세우며 달러화의 기축통화 지위에도 도전하고 있다. 동시에 중국은 ‘평화발전’을 강조하며 베이징올림픽, 상하이엑스포 등과 같은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고 공자학원, 탁구 아카데미를 통해 중국의 소프트파워를 널리 알리며 중국 대외 이미지 개선에 앞장서고 있다. 이와 동시에 대만 문제, 위안화 환율 문제, 인권문제, 동 남중국해 영토 문제, 티베트 문제, 북핵 문제 등 중국의 핵심이익이나 주권문제가 걸린 현안에서 중국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에 따른 주변국과의 마찰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추세다.

현재 중국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산하에 설치된 중앙외사영도소조를 통해 당의 외교방침을 국무원이나 공산당 대외연락부 등 외교관련 부문에 반영하고 있다. 외사영도소조 조장과 부조장은 각각 후진타오 주석과 차기 주석이 확실시되는 시진핑 부주석이 맡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 중국의 국력에 맞는 외교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내부적으로 커지면서 시진핑 지도부 체제 아래서는 중국 외교 실무사령탑인 외교부총리의 당내 직위를 기존의 중앙위원에서 정치국원으로 격상시켜 힘을 실어준다는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