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삼국지 50 -충칭편> 1. 유비, 제갈량에게 아들을 맡기다

2012-03-16 14:37

朝辭白帝彩雲間, 千裏江陵一日還(조사백제채운간, 천리강릉일일환)
兩岸猿聲啼不住, 輕舟已過萬重山(량안원성제부주, 경주이과만중산)

아침에 구름 사이로 백제성을 떠나, 천리길 강릉을 하루에 돌아왔네
양안의 원숭이 소리 끊이지 않는데, 작은 배는 이미 만 겹이나 되는 산을 지났네
-이백(李白)

백제성은 창장에서 가장 뛰어난 절경을 가진 관광지 중 하나이다. 일찍이 이백, 두보, 백거이, 육유 등 중국 유명 시인들이 이 곳을 찾아 창장의 경치를 감상하며 숱한 걸작을 남기기도 해 ‘시성(詩城)’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 역사 속에서 백제성은 비운의 역사를 간직한 성이기도 하다.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나라와 벌인 이릉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한 유비는 백제성(白帝城)으로 후퇴한다. 아우를 잃은 슬픔과 자책, 그리고 허탈감으로 중병에 걸린 유비는 이곳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백제성을 ‘상성(傷城 상처의 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취재진은 아름다운 절경 속에 역사의 상처를 안고 있는 충칭시 펑제현(奉節縣)의 백제성으로 향했다.

국가지정 4A급 문화유적으로 지정된 백제성의 본래 이름은 자양성(子陽城)이다. 창장(長江) 싼샤(三峽, 삼협) 중 한 곳인 취탕샤(瞿塘峽) 입구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뛰어난 절경을 자랑한다.

백제성으로 가는 길은 좁은 산길의 연속이다. 굽이굽이 난 도로를 따라 차가 달리니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곳곳에서 가축들이 도로로 난입해 차량의 진행을 가로 막았다. 그러나 운전기사는 이런 일이 다반사라는 듯 가축들이 나타날때마다 차를 세우고 느긋하게 기다리곤 했다.

백제성 앞에서 우리 취재진은 반가운 행렬을 만났다. 바로 자전거 동호인들이었다. 중국에서 자전거는 오랫동안 하나의 교통수단이었다. 하지만 소득이 늘면서 지금은 자전거가 레저스포츠용으로 둔갑한 것이다.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5000불을 넘어섰다는 뉴스를 얼마 전 접했는데 과연 중국의 생활수준이 이렇게 높아졌구나 실감할 수 있었다.

지역 자전거 동호인들. 높아진 생활수준을 실감할 수 있었다.


취재팀은 동호인 한명에게 백제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백제성은 유비와 관련된 유적으로 우리 펑제현 사람들은 주말이면 이 곳에 자주 놀러옵니다. 무엇보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유비와 관련된 유적이기 때문이지요.”라고 대답하였다.

창장변까지 이어진 계단을 따라 쭉 아래로 내려가니 긴 다리 너머로 백제성이 보였다. 2008년에 지어졌다는 다리는 창장을 가로질러 고도(孤島)까지 이어져 있었다. 특히 좌우로 깃발이 펄럭이고 전통양식으로 지어져 고풍스러운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다리가 지어지기 전에는 배를 타고 건너갔다고 한다.

긴 다리 끝 고도위에 백제성이 보인다.


원래 이 곳은 삼면만 창장을 접하고 한 면은 산으로 이어진 천혜의 요새였다고 한다. 하지만 싼샤댐 건설로 네 면이 모두 강으로 둘러싸인 고도가 된 것이다.

긴 다리를 지나니 나즈막한 산길이 백제성 입구까지 쭉 이어진다. 양 옆으로 선계(仙界)와 같은 절경이 쉴 새 없이 이어지니 지루할 틈이 없다.

백제성 입구. 화려한 채색이 눈에 띈다.


백제성 입구는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 등 화려한 색상의 온갖 문양으로 치장돼 있었다. 마치 여러 사람이 각자 부분을 맡아 만든 것처럼 제 각각이니 약간 촌스럽긴 하지만 문양 속에 담긴 익살과 서민들의 예술세계를 엿볼 수 있으니 재미있다.

무엇보다 취재진의 눈길을 끈 것은 백제성 입구 맞은편에 있는 돌사자상이다. 보통 돌사자상은 여의주를 입에 물고 있거나 앞발로 누르고 있는데 이 돌사자는 여의주 대신 자기 새끼를 발로 누르고 있었다. 마치 사자 개 두 마리가 우리들에게 재롱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니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새끼를 앞발로 누르고 있는 돌사자. 특유의 해학이 느껴진다.


백제성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앞에 탁고당(托孤堂)이 있었다. 탁고란 임금이 죽기 전 어린 황태자를 신하에게 부탁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곳에서 촉한의 황제 유비는 자신의 아들 유선(劉禪)을 제갈량에게 부탁한다.

서기 221년 유비는 의형제인 관우와 장비의 원수를 갚고 형주를 수복하기 위해 손권의 오나라를 침공한다. 222년 6월 이릉대전(夷陵大戰)에서 유비는 육손(陸遜)의 화공(火攻)과 뒤이은 공격에 참패를 당하고 백제성까지 물러났다.

원래 유비는 이 곳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공격을 감행하려고 했으나 의형제 관우, 장비의 죽음과 패전으로 인한 자책감과 슬픔, 허탈함이 겹쳐 그만 중병에 걸려버렸다.

유비는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직감하고 백제성 밖 영안궁(永安宮)에서 치료를 받으며 청두(成都, 당시 촉한의 수도)에 있던 제갈량을 급하게 불렀다. 영안궁이라는 이름은 글자 그대로 영원히 평안하다는 뜻으로 유비가 지었다고 전해진다.

유비가 제갈량에게 “내 아들이 우둔하니 잘 보살펴 주길 바라네. 그러나 보좌를 해도 잘 되지 않으면 자네가 왕으로 독립해도 되네”라고 하자 제갈량은 눈물을 감추지 못하며 “제가 어떻게 그렇게 하겠나이까, 꼭 충성으로 이 나라에 봉사하겠습니다”고 했다.

당시 유비의 아들이자 황태자 유선의 나이는 17세. 당시 전통에 따라 황제가 전쟁을 수행할 때 태자는 반드시 수도를 지키며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야 했다. 따라서 유비가 제갈량에게 유선을 탁고할 때 유선은 현장에 있지 않았다. 유비의 곁에는 둘째, 셋째 아들로 당시 9살이었던 유영(劉永)과 7살이었던 유리(劉理)가 아비를 지키고 있었다.

탁고 후 서기 223년 유비는 결국 영안궁에서 영원한 평안에 들어가게 된다.

병상에 있는 유비를 제갈량이 지키고 있다.


이 곳 탁고당의 조각들은 당시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제갈량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이 비통한 표정으로 유비 곁을 지키고 있고 두 아들은 제갈량을 보며 절을 하고 있다. 총 11명의 장수들이 유비 곁을 지키고 있는데 실제 역사에서는 이보다 적었다고 전해진다.

문득 고개를 돌려 보니 유비의 왼쪽에 있는 자의 표정이 유독 간사해 보였다. 가이드는 “저 사람은 이엄(李嚴)이라고 하는데 나중에 제갈량을 배신하게 된답니다. 스스로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어요”라고 귀띔을 준다. 제갈량이 다섯 번째 북벌을 성공하기 직전 이엄이 식량운반을 못한 책임을 회피하려고 손권이 쳐들어온다고 거짓 보고를 하는 바람에 제갈량은 철수 해야만 했다. 그래서 황제 유선이 이엄의 일족을 멸하려고 하자 제갈량은 이엄이 ‘탁고지신(탁고시 곁에 있었던 신하)’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형벌을 낮추고 평민으로 추방해 버린다.

1984년 사람들은 백제성에 탁고당을 지어 기념하기 시작했다. 백제탁고(白帝託孤)라는 말도 있듯이 백제성은 탁고의 역사적 장소로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관람을 마치고 내려오던 순간 안내원은 혼잣말로 “실제로 탁고한 곳은 여기가 아니지”라고 중얼거린다. 그 연유를 자세히 물어보니 실제 탁고한 곳은 영안궁이었으나 그 일대가 쌴샤댐으로 인해 잠기게 되자 현재의 보탑평(寶塔坪)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럼 왜 탁고당은 백제성 안에 있는 것일까? 안내원은 당시 유비가 도망 온 곳이 백제성이고 이어 곧 탁고를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영안궁이 아닌 이 곳 백제성에 탁고당을 지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입구 옆에 있는 비석들. 장쩌민, 저우은라이, 마오쩌둥이 백제성에 대해 남긴 글이다.


백제성을 한 바퀴 돌고 나오는데 왼편에 비석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장쩌민 등 중국 역대 최고 지도자들이 적은 글들이 비석에 새겨져 있다. 특히 장쩌민과 저우언라이는 이 곳에 직접 와서 시를 적은 것이라고 안내원은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