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이병호 "모든 변화는 찰나에 깨닫지 않나"

2012-01-16 19:15
사간동 16번지서 '변질과 회복'주제 'Shade Tree'전 열어

Deep Breathing,2011,silicone and air compressor,165x57x37cm.
Deep Breathing,2011,silicone and air compressor,165x57x37 cm.

(아주경제 박현주 기자) '변질과 회복'이라는 주제로 실리콘과 공기를 이용한 조각 작품을 선보여온 작가 이병호의 'Shade Tree'전(2011.12.8~2012.1.15일)이 서울 사간동 16번지(대표 도형태)에서  열렸다.  'Shade Tree'는 그림자를 만들어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주고, 나무들이 좋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심는 나무로 그늘을 만들어주는 우리들의 집과 가족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작가는 변형이 쉬운 실리콘 재료의 특성을 이용한 조각작품들은 ‘변하지 않는다’는 조각에 대한 통념을 깨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정적 모습으로 일그러져 변화와 변질에 대한 작가의 회의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다음은 작가와의 인터뷰>

-'변화와 변질'은 어떤 의미인가.

▲내 작품에서 말하는 변화는 매 순간 감지할 수 있는 변화는 아니다. 오랜 시간을 거치는, 누구도 쉽게 느끼기 힘든 지루한 변화다. 하지만 좀처럼 알아챌 수 없었던 변화는 그 지루한 변화를 감지한 순간, 지나온 긴 시간을 단숨에 함축한 찰나로 다가온다. 가장 긴 시간을 품으면서 동시에 가장 빠른 변화다.

다만 실리콘 작품의 외형이 공기압축장치에 의해 변형하는 것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표면적인 변화이지만 그 변화는 겉모습에 한정하고 있지 않고 내면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를 들어 언제나 청춘일 것만 같았던 나의 젊은 시절, 또 그 시절의 푸른 생각들, 영원히 지켜지리라 믿었던 약속, 그리고 언제나 곁에 계실 것만 같았던 부모님 등등. 변치 않을 것 같았던 이런 모든 변화는 긴 시간이 흐르고 나서 예기치 못한 순간에 깨닫게 되지 않는가.

Shade Tree, 2011, mixed media,31x36x69 cm.

-‘Shade Tree’ 전시에는 스토리가 존재한다. 과거 전시와 달리 스토리에 주목한 이유는.

▲이번 전시에서도 이전의 전시에서 보여줬던 변화나 변질의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다만 그 표현을 16번지 갤러리가 가진 공간의 특수성을 살려서 풀어보고 싶었다. 16번지 갤러리는 다소 오래된 일반 주택을 개조한 갤러리다. 이 집에 살았을 가상의 인물에 각각 나름의 사연을 담고 작품으로 등장시켰다. 과거부터 이 집에 살았던 사람들, 그리고 세대가 바뀌고 지금까지 살고 있는 사람들, 또는 다른 가족들. 이러한 과거와 현재의 사람들이 세대를 초월해 한꺼번에 등장하고 있다.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처음과 끝, 그리고 그들의 긴 시간에 걸친 변화의 여정을 통해 변화와 변질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사진 작업들은 오래된 집의 불투명 유리창을 사용한 액자 안에 담겨 흐릿하게 보여지는 게 특이하다. 이 유리와 사진 작품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전시장에 있는 조각들이나 사진들은 지금 현존하여 보여지는 것들이지만,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은 손에 잡히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희미한 기억이나 그리움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또렷하게 기록된 사진을 희미하게 표현해야 효과적일 것이라 느꼈고 오래된 집에서 떼온 무늬유리를 사용했다. 지금은 생산되지 않는 오래된 유리에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그 시절, 기억 속의 제가 살던 집의 유리창이, 그 때를 떠올리는 물건으로 아련한 추억 속의 시절로 연결해주는 매개체의 창이라고 할 수 있겠다.

School Boy, 2011, black and white print and patterned glass,107x51x5cm.
-얼굴을 가린듯한 여자의 모습, 불투명한 유리 상자 안에 담겨있는 남자의 모습, 흐릿하게 처리 된 가족 사진 등, 누워있는 인형 조각을 제외하고는 얼굴을 완전히 드러내고 있는 작품은 없는 것 같다. 몸을 웅크려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나, 불투명한 유리창 뒤에 숨어 있는 남자의 모습 등, 표정을 알 수 없는 작품들. 얼굴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이들의 정체성을 숨기고자 하는 의도인가.

▲전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특정한 누군가를 대변하고 있진 않다. 보는 사람에 따라 누군가를 떠올릴 수는 있겠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오래된 집의 창틀에서 떼온 무늬유리를 오브제로 사용하였다. 이 오브제로 조각과 사진들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시각을 무디게 하는 것은 대상에 대한 불확실성을 키우려는 설정이었다. 마치 기억처럼. 기억이란, 단어 자체에 과거를 품고 있고, 현재하지 않으며, 눈앞에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반투명 유리 너머의 흐릿한 사진들은 등장인물들의 사연을 유추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불투명한 유리 안에 분명히 존재하는 작품은 자세히 보려 하면 할수록 보이지 않는다. 떠올리려 하면 할수록 떠오르지 않는 뭉뚱그려진 기억처럼 말이다.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는 마치 석고상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작품이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을 때 마치 석고상이 움직이는 것 같아서 뭔가 이상하다라는 생각이 들다. 이는 변화를 통해서 놀라움을 극대화 시키려고 한 의도인가. 또한 작품 하나 하나가 매우 정교하다는 느낌을 받는데, 작품 제작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

 
Portrait of the Man, 2011, mixed media, 48x48x162 cm.

▲석고상 이야말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확신을 주는 조각이다.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고 그 믿음을 깨트리기에 적절한 대상이다.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대상을 석고상의 형상으로 만들고 그것을 일그러뜨리는 작업이 주제를 표현하는데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이번 전시에도 석고상의 형상을 빌린 작품이 있다. 누워있는 여인을 석고상처럼 만들었다. 조각상은 재현이다. 현재에 없는 기억 속 대상에 대한 기념비다. 여인에 대한 기억의 증명과도 같은 여인 조각상은 석고의 단단한 물성을 부정하듯 이내 일그러지며 현실성의 벽을 허문다. 이는 여인이 재현된 것이라는(과거에만 존재한다는) 믿음, 여인(석고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또는 변하지 않길 원하는 바램을 깨는 것이다.

작품 제작상의 어려운 점은 한 작품을 만드는데 여러 가지 공정이 필요해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이다. 한 작품을 위해서 두 개의 조각을 해야 하고 실리콘이라는 재료는 다소 다루기가 어려워서 몇 번이고 재 작업을 하기도해야한다.

-앞으로 작업의 방향과 추구하는 예술세계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도 한편으로 작업스타일에 대한 한계와 제작 과정의 어려움 등으로 피로감을 느꼈었다. 그로 인해 다른 스타일의 작업에 대한 열망이 조금 있었다. 그런데 누워있는 여인을 조각한 “Deep Breathing”을 제작하면서 무엇보다 실리콘 작업에 대한 기술적인 노하우가 많이 생겼고, 완성도에 대한 욕심이 조금 생겼다. 여러 가지 재미있는 형태와 이전과 다른 완성도를 이끌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 한번 정도는 오직 실리콘 작품만으로 개인전을 구상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병호(36)= 2004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졸업,2010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조소과 졸업

개인전 3회.2011 SeMA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2010~2011 난지미술창작 스튜디오, 서울시립미술관,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