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삼국지기행 19 안후이성편> 3-1 하늘이 내린 신의(神醫), 화타

2012-02-06 12:55

(아주경제 홍우리 기자)‘교노대(敎弩臺)’를 둘러 본 취재팀은 보저우(亳州)로 향했다.

안후이(安徽)성의 서북부에 위치한 보저우는 3500여년 전 상(商)나라의 성탕(成湯)이 이 곳에 도읍을 정한 이후 걸출한 인물들을 대거 배출했다. 위(魏)나라의 시조 조조와 신의(神醫) 화타(華陀)를 비롯해 ‘중국 역사명인 대사전’에 언급된 인물만 100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허페이(合肥)시에서 보저우까지는 차로 4시간 정도가 소요됐다. 빠듯한 일정을 맞추기 위해 서둘러 발길을 재촉했지만 보저우시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해가 진 뒤였다. 곳곳에 들어서고 있는 아파트 사이로 화려한 네온사인이 비치던 허페이시와 달리 보저우의 밤은 한적했다. 저녁 일곱시를 갓 넘긴 시각이었지만 넓은 대로는 텅 비어 있었고 드문드문 서있는 가로등만이 어두운 거리를 희미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도로 한편에 자리잡은 초라한 간이 식당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취재팀을 태운 기사가 돌연 차를 세운다. 일찍 찾아온 어둠과 부실한 이정표에 초행인 기사가 길을 잃은 것. 행인에게 길을 묻기 위해 창문을 연 순간 쌉싸름한 향이 차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서 너 번 더 길을 물은 끝에 숙소에 도착했다.

이튿날, 보저우에서의 일정은 화조암(華祖庵)에서부터 시작했다. 화조암은 중국 한말(漢末)의 전설적 명의 화타를 위해 지어진 사당으로 해마다 화타를 기리는 제사가 이 곳에서 진행된다.
“진수의 역사서 삼국지 중 화타전(華陀傳)과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 ‘치풍질신의신사, 전유명간우수종(治風疾神醫身死, 傳遺命奸雄壽終 풍을 고치는 신의가 죽고 간웅의 수명이 다하다)’를 보면 화타와 관우, 화타와 조조 사이에 있었던 일화를 비롯해 수많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죠. 화타는 보저우 시민뿐만 아니라 전 중국인이 사랑하는 인물입니다.” 안내원이 화타에 대해 설명했다.

평소 두통이 심했다는 조조는 아무리 좋다는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었다.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이 죽고 난 뒤에는 심리적 불안감까지 겹치며 두통이 더욱 악화되었다. 이 때 신하 중 한 명이 그에게 민간 명의 화타의 의술에 대해 설명했고 조조는 곧 화타를 불러들인다. 조조를 알현한 화타는 “왕의 머리가 아프신 것은 머리에 ‘풍질(風疾)’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약을 처방하고 침을 놓아 일시적으로 통증을 가라앉힐 수는 있지만 근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근본 해결책을 묻는 조조에게 “제게 있는 마비산(麻沸散)을 사용해 정신을 혼미하게 한 뒤 도끼로 머리를 가르고 병의 뿌리를 제거하면 두통을 낫게 할 수 있습니다”고 대답했다.

의심이 많은 조조는 관우를 죽게 한 자신을 화타가 해하려 한다고 믿고 수술 대신 언제든 처방을 내릴 수 있도록 자신의 곁에 남아 어의(御醫)가 될 것을 명한다. 그러나 평소 자신의 의술을 누구 한 사람이 아닌 백성을 위해 사용하고 싶었던 화타는 조조의 명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왕의 명을 거역할 수도 없는 노릇. 화타는 고향에 있는 부인이 위독하다는 거짓을 고하고 조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화타가 고향으로 돌아간 뒤 조조는 다시 군사를 불러 화타의 말을 확인케 했다. “화타의 말이 사실이거든 살려두고 거짓이거든 붙잡아 감옥에 가두어라.”
결국 화타의 고향을 찾은 조조의 병사에 의해 화타의 거짓말은 탄로가 났고 화타는 그 길로 체포되었다. 조조가 있는 낙양으로 향하는 길에 오른 화타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고 조조의 처형이 내려지기 전 향수병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생을 마감했다.

“조조가 화타를 직접 처형한 것은 아니지만 화타는 조조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안내원은 명의 화타를 죽게 한 것은 결국 조조라고 말했다.
화타가 죽은 뒤 조조는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후회하며 화타의 고향에 그를 기리는 사당을 지었다는데, 취재팀이 찾은 화조암이 바로 그 것이다. 그러나 화조암 건립과 관련해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화타가 세상을 떠나고 가족들이 고향을 등진 뒤에도 백성의 아픔을 돌보고자 했던 화타를 기리는 후대의 마음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이어졌다. 당(唐)나라 초기 화타가 살 던 옛 집 앞에 사당이 들어섰고 청대에 이르러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 공사가 이뤄졌다. 이후 1962년 보저우 지방 정부가 화타 사당을 대대적으로 정비한 뒤 화타의 업적을 기록한 화타기념관을 증축하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화조압 입구.


화조암 매표소에 걸려있는 한국어 설명문.


회색 빛 벽돌 벽을 지나 매표소로 들어서는데 왼쪽 벽에 한글로 된 안내문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셔터를 눌렀지만 무슨 뜻인지 알수 없을 정도로 한글 번역이 너무 엉터리였다.

매표소 바로 앞에 놓인 화타 사당.


정전 내부에 서있는 화타상.


입구 바로 앞 정전이 눈에 들어왔다. 정전 안에는 진지한 표정의 화타 상이 서 있다. 마른 몸에 깊게 패인 주름에서 더 많은 환자를 돌봐주지 못한 아쉬움이 느껴지는듯 했다.

화타기념관으로 향하는 입구.


화타기념관으로 향하는 입구.


정전을 둘러본 뒤에는 오른 쪽 낮은 담 사이로 난 입구를 통해 기념관으로 들어갔다. 기념관에서는 화타의 생전 모습을 담은 그림과 그의 업적 등을 한눈에 확인 할 수 있었다.

마비산을 연구하는 모습의 화타.


숲 속에서 동물의 움직임을 연구하고 있는 화타.


다섯 동물의 움직임을 기초로 고안했다는 화타의 오금희.



마비산을 연구하는 모습, 산 속에서 5가지 동물의 움직임을 따라 만들었다는 ‘오금희(五禽戱)’의 동작을 하고 있는 화타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보저우에서 발견된 화타기석은 화타의 모습과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기념관에는 또 거대한 바위가 자리잡고 있었다. 보저우에서 발견된 것으로 돌의 형상이 마치 화타와 닮았다 하여 ‘화타기석(奇石)’이라고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누가 어떻게 이 돌을 발견했는지 그 과정이 사뭇 궁금했지만 그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한 걸음 떨어져 기석을 바라보니 생각에 잠겨 몸을 기울인 듯한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화타기념관에 전시 중인 다양한 약재.


전시관 마지막에는 다양한 한약재들과 보저우의 특산품인 구징궁주(古井貢酒)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약재∙약초는 화타와 같은 명의에 있어 천하의 어떤 보물보다 소중한 물품이었을 것이다. 천하의 명의를 배출한 보저우는 중국 4대 약재 시장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술 음식 등 많은 먹거리에도 몸에 좋다는 약재가 사용되고 있었다. 지역 특산인 약재를 대하고 보니 보저우에 들어섰을 때 코 끝을 찔렀던 쌉싸름한 냄새의 정체가 밝혀지는 듯 했다.

원화초당에서 휴식 중인 화타.


화타가 제자들을 르치던 곳인 과도관.


기념관 밖으로 나오자 화타의 휴식공간이라는 '원화초당(元化草堂)'이 있고 그 좌우에 환자를 진료했다는 익수헌(益壽軒)과 약을 조재했다는 존진재(存珍齋)가 나타났다. 화타가 약초를 가꾸던 공간은 오늘날 작은 못과 정자가 어우러진 고약원(古葯園)으로 변해 있었다. 이 곳에 심어진 식물들은 약효가 뛰어난 약초라고 했다.

화조암에서 재배중인 약초.


창궐하는 역병에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고자 우물에 약초를 뿌렸다는 화타. 왕이 내린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내놓으며 만인의 생명을 구하고자 했던 화타는 중국인에게 있어 명의 이상의 존재였다. 일개 기술직에 불과했던 미천한 신분의 화타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神醫)가 되어 190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회자되며 백성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있었다.


(아주경제 홍우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