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삼국지기행10-산시성편> 4-1 베일에 가린 나관중 下 - 칭쉬현 ‘나관중 기념관’

2012-02-06 13:05

베일에 가려진 나관중 下


(아주경제 홍우리 김희준 기자) 진중(晉中) 치(祈) 현에서 나씨사당과 나씨 가계도, 족보를 확인한 취재팀의 마지막 코스는 칭쉬(淸徐)현이었다. 어느 덧 밝아온 산시성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우리는 다시 차에 몸을 실었다.

타이위안(太原) 시 남쪽에 위치한 칭쉬현은 치현에서 50k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산시성 삼국지 탐방 기간 동안 우리의 주 노선이었던 징쿤(京昆) 고속도로를 타고 50여분 달려 칭쉬현에 도착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바라본 칭쉬현은 아담하지만 조용한 분위기였다. 나관중 기념관 입구에서 우리를 마중나온 칭쉬현 여유국 직원들과 인사를 나눴다.

타이위안시 칭쉬현에 위치한 나관중기념관 입구의 모습.


나관중 출신지역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던 1930년대, 원(元)말 명(明)초 사람이 엮은 <록귀부속편(錄鬼簿續編)>이 발견되었다. 특히 이 책에서 羅貫中, 太原人 이라는 기록이 확인되며 나관중의 고향이 타이위안이라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대략적인 언급만 있을 뿐 구체적 지역에 관한 기록은 없어 연구는 제자리 걸음이었다.

1984년, 원(元) 나라 유명 시인인 우집(虞集)의 ‘도원학고록(道園學古錄)’ 10권에서 ‘제진양나씨족보도(題晉陽羅氏族譜圖)’라는 글이 발견되었고, 이를 통해 쓰촨(四川)에서 타이위안으로 이주해 온 나씨가족의 존재가 다시한번 드러났다.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타이위안시 전 지역을 수소문, 87년 칭쉬현에서 ‘나씨족보(羅氏家譜)’를 입수한다. 나씨족보에서도 ‘나관중’이나 그의 본명으로 알려진 ‘나본(本)’은 확인할 수 없었으나 학자들은 6대 나금(羅錦)의 둘째 아들에 관한 기록에 주목했다. 이름대신 남아있는 ‘次子出外’ 네 글자. 전문가들은 나씨 후손의 항렬과 형제간 돌림자, 시대 상황 등에 대한 고증을 통해 빈 자리로 남아있는 7대손 차남이 나관중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들은 원나라 통치 시기, 농민봉기 내용을 담은 소설 ‘수호전(水滸傳)’ 창작에 참여한 나관중으로 인해 가문의 안전이 위협받게 되자 족보에서 이름을 지운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나씨족보 서문에 기술되어 있는 칭쉬 나씨가문 가사(家史)와 배경이 나관중 소설 및 희곡 작품에서 나타난 역사적 배경과 놀랄만큼 비슷하다는 점도 근거로 제시되었다.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진중(晉中)시 치현의 허완(河灣)촌에서 나씨사당과 나씨가계도 족보 등 나관중이 치현 사람임을 뒷받침하는 자료들이 새롭게 발견되었다. 이후 학계에서 칭쉬현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작아지면서 칭쉬현의 입지가 흔들렸지만, 현지인의 믿음은 여전히 확고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기념관의 붉은 색 대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나관중 기념관 내부 안내도.


500㎢ 대지에 들어선 나관중 기념관은 칭쉬현 나씨 가문의 21대손 뤄얼둥(羅二棟)이 나관중을 기념하기 위해 사비를 털어 조성한 것으로, 2000년 완공되었다. 중국 유일의 나관중 기념관으로, 사유재산이지만 현지 여유국의 관리·보호를 받고 있다.

나관중기념관 내부로 들어가면 젊은 모습의 나관중 석상이 서있다.


대문이 열린 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나관중 석상(石像)이었다. 왼손에 삼국(三國)이라고 쓰인 책을 꼭 움켜쥔, 젊은 모습의 나관중이 서 있었다. 석상을 기준으로 좌우 양 옆에 난 길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석상 뒤의 자그마한 연못과 그 좌우에서 시작되어 기념관 중심 건물인 '주전청(主展廳)'으로 닿은 회랑(지붕이 있는 복도)까지, 청(淸)대 정원 양식을 따른 구조다.

나관중 석상 뒤에 자리잡은 연못과 석교의 모습.


맑게 개인 가을 하늘 아래, 연못이 푸른 하늘을 담아내고 있었다. 연못 위에 놓인 작은 석교를 지나 '문소육합(文昭六合)' 금빛 글씨가 화려한 현판이 걸린 주전청으로 들어갔다. 본당 양 옆에도 각각 기념관이 마련되어 있었으나 아직 내부 정리가 끝나지 않아 주전청 관람만 허락되었다.

'문조육합'이라는 현판이 걸린 기념관 주 전시실의 모습.


은은한 조명의 주전청 내부는 깔끔하고 잘 정돈된 느낌이었다. 주전청 문턱을 넘자마자 어두운 금빛을 뿜어내는 나관중 동상이 자리잡고 있다. 그 뒤 벽면에는 본명을 비롯한 나관중 관련 설명을 담은 글이 걸려 있었다.

주 전시실 입구를 들어서면 노년의 모습을 한 나관중 동상을 볼 수 있다.


전시실 벽면에 걸려있는 나씨조훈.


드라마에 등장한 나관중의 모습.


칭쉬현 나씨 후손의 이동 경로.


나씨가계도.


벼슬을 지냈던 나씨선조에 대한 설명도 있었다.


오른에서 왼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둘러봤다. 제갈량의 출사표 복사본을 시작으로 생애와 출신지역 등 나관중 관련 자료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림책으로 엮은 삼국연의와 나씨가계도, 칭쉬현 나씨의 이동경로, 벼슬을 지낸 나씨 선조에 대한 설명도 확인할 수 있다.











왼편에는 칭쉬현이 나관중의 고향임을 뒷받침하는 나씨족보와 비석, 비석 탁본, 관련 논문 및 학술 저서 등이 전시되고 있었다.

"나관중은 틀림 없는 칭쉬현 사람입니다. 족보와 비석 등 이를 증명하는 상당수 역사 유물들이 칭쉬현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현지 삼국지 전문가가 취재진을 향해 목소리에 힘을주어 말했다.

민간에서 구전되는 삼국 내용에 역사서 삼국지에서 소재를 취하고, 여기에 자신이 머문 시대의 경험을 첨가해 만든 소설 삼국연의. 시공을 초월한 걸작을 세상에 내놓고도 정작 자신과 관련된 모든 내용은 후대의 숙제로 남긴 나관중이다.

나관중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원말명초, '글쟁이'의 생활은 배고프고 작품이 유명세를 탄 뒤에도 경제적인 보상은 기대하기 어려웠던 시대다. 여기에 삼국연의에서 드러난 해박한 역사지식과 높은 문화적 소양 등으로 미루어 나관중이 명문가문은 아니더라고 어느 정도 생활이 풍족한 학자집안의 자제였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반면 허완촌 나씨사당을 세울 때 기부했다는 액수 등에서 나관중은 몰락한 가문의 자제라는 주장도 있다.

羅貫中, 太原人, 號湖海散人. 樂府隱語,極爲淸新. 與餘爲忘年交, 遭時多故, 天各一方. 至正甲晨復會, 別來又六十餘年, 竟不知所終.

위에서 언급한 '록귀부속편'에 등장하는 나관중에 대한 기록이다. 이름과 출신, 호와 함께 소극적이고 다른 사람과의 사귐을 꺼려했던 나관중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환갑이 넘어서는 아예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인생 말년에 이르러서는 '허관충(許貫忠)'으로 이름을 바꾸고 봉건왕조의 통치세력이 미치지 않는 작은 산골 마을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의 허난(河南)성 허비(鶴壁)시 쉬자거우(許家溝)촌이에서 남은 인생을 보내며 불후의 명작 삼국연의와 수호지를 완성했다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베일에 가려진 나관중의 뿌리를 찾아 타이위안시의 치현과 칭쉬현을 찾았지만 나관중에 대한 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더욱 커져갔다. 그러던 중 문득, '흘러간 역사는 주어진 최소한의 증거를 바탕으로 더 큰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관중의 고향, 출신가문, 말년의 생활 등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 않지만 그가 남긴 작품을 통해 삼국의 영웅들을 만나게 되었지 않은가. 또한 나관중의 고향을 자처한 각 지역의 주민들이 나관중의 후예라는 자부심으로 살아가고있는 만큼 나관중은 그 존재 자체로 의미있는 것이 아닐까.

나관중 기념관 관람을 끝으로 계획된 산시(山西)성 삼국지 탐방 일정이 끝났다. 일주일이란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빨리 지나갔다.

기념관을 나서는데 이 곳 사람들을 통해 확인한 관우와 나관중에 대한 열렬한 사랑이 머릿속을 스쳤다. 쓰촨(四川)성에서는 삼국지의 어떤 장면과 만나게 될까, 기대가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