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KDI 비화-4]“박정희, 하야하고 김종필·김영삼·김대중 경합”

2011-03-11 11:17
“쉬면서 애들 시집·장가 보내야지”…서거후 집 한채, 9억원이 전부

(아주경제 이상준 기자) 한국개발연구원(KDI) 개원 40주년을 맞았다. 대한민국의 내일을 설계하는 KDI(원장 현오석)는 3월 10일 서울 홍릉 본원 대회의실에서 개원 4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이날 김황식 국무총리를 비롯해 김만제 초대 KDI 원장, 허태열 국회 정무위원장, 조순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 등 국내 경제학자들이 다 모여 성황을 이루었다.

아주경제는 많은 축사와 치사 등이 나온 가운데 특히 큰 호응을 받은 김정렴 전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의 기념연설을 4회에 나누어 싣는다.

(4회) 못다한 이야기

박정희 대통령은 1978년 제 9대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유신헌법 완화 개정작업을 지시했으며, “임기 종료 1년 전에 하야해서 김종필 씨를 다시 총리로 임명한 뒤 대통령권한대행을 맡기고, 그다음 대통령선거는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이 경합하도록 하겠다”라는 결심을 피력했다.

박 대통령은 “경제를 이만큼 일으켰고, 카터의 美 지상군 완전 철수 때까지 안보 기반을 단단히 다져 놓았으니, 나라를 위해 할 만큼 한 것 아닌가? 이젠 나도 좀 쉬면서 애들 시집, 장가나 보내야겠다”라며 인간적인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 서거 후 남겨진 재산은 신당동의 일본식 단층 35평짜리 주택과 성금으로 받아쓰고 남은 정치자금 9억원이 전부였다.

박 대통령은 대원군 집권 4년 후인 1867년에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단행해 문호를 개방하고 부국강병을 기치로 농업을 진흥하고, 생사와 일본 차의 수출을 확대하는 한편, 경공업과 이후 중화학공업을 일으켜 경제대국이 된 과정을 잘 알고 있었으며,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벌여 설립한 만주국에서 중화학공업을 일으킨 과정을 만주군관학교 시절 견문문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5개년 계획과는 관계없이 ①사방사업을 위한 강제노동인 부역(賦役)제,②식목일 외의 검목일(檢木日) 및 육림의 날 지정, 산림 도벌(途伐)방자를 위한 산림청의 내무부 이관 등의 산림 정책, ③다수확 품종인 통일벼 개발, ④고속도로 건설, ⑤한해(旱害) 상습지역 지하수 개발용 관정(管井) 30만정 타설(打設), ⑥농촌과 도시의 청소년을 위한 기능공 양성 정책, ⑦새마을운동, ⑧대전 이북은 추워서 안 된다는 비닐온상 재배를 연구개량해서 전국에 보급한 온상재배, ⑨국제규모에 한참 모자랐던 종합제철과 석유화학공업 육성, ⑩평상시에는 70%의 민수품(民需品)을 생산하되 유사시에는 100%를 생산하는 방위산업의 육성 등 수많은 독창적 시책을 창안(policy innovation)해 경제 개발을 이끌었다.

1993년 World Bank의 초대로 ‘東아시아로부터의 교훈’이라는 간담회에서 박 대통령의 경제정책을 강연했는데, World Bank는 이후 본인의 회고록인 ‘한국경제정책 30년사’중 박 대통령 시절 부분만을 따로 정리한 ‘Policymaking on the Frontlines’를 첫 번째 경제정책수립 회고시리즈로 출판했다.

World Bank는 책을 출판하면서, 일차적으로 개발도상국과 자유진영으로 전환하는 舊 공산권 국가의 공무원을 위해 출판하는 것이긴 하나, 개발 경제학, 정치학, 국제관계, 지역 연구 분야의 학생들에게도 참고가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김정렴 前 대통령비서실장>
1924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정렴 前 대통령비서실장은 44년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에 입행한 후 주일대사를 사임한 80년까지 약 2년간의 공백을 빼고는 24년에 걸쳐 대한민국 중앙은행과 행정부에서 공직을 역임했다. 재무부, 상공부 장관을 거쳐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김정렴 前 대통령비서실장은 경제개발정책의 수립과 집행 과정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며 한국경제 발전의 산파 역할을 담당했다. 9년 3개월의 재임기간으로 역대 최장수 대통령비서실장의 기록을 세운 김정렴 前 비서실장은 주일대사직을 마지막으로 말년의 공직 생활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