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로] 현대인들의 숫자놀음

2011-02-10 15:57

박화영 미디어작가 겸 출판사 대표

내가 아는 한 지인은 뉴욕의 유명한 금융회사에 다니며 날고뛰는 거대 기업들을 합병시키는 M&A 전문가로 젊은 나이에 기량을 인정받았다. 그는 회사 전용기로 출장을 다니며 고객과 저녁식사에 수천 달러짜리 와인을 마신다. 아주 높은 연봉을 받으며 뉴욕의 다운타운 트라이베카에 운동장만한 펜트하우스에 혼자 살며 고급승용차를 타고 다닌다.

매일 바쁘고 치열한 생활에 쉴 틈도 없는 것처럼 일하는 그가 문득 자신이 하는 일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니, 자신의 직업이 매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뉴스에 보도될만한 기업들의 합병들을 성사시키며 어마어마한 액수의 자본을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큰 이윤을 창출하는 성과를 거두면서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신이 하는 일은 그저 숫자를 여기저기로 옮기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손으로 잡히는 것 하나 없이 데이터로서의 숫자만을 다루는 일이 가끔 허탈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은 돈을 빨리 벌고 일찍 은퇴해 남은 생은 조경을 하며 나무를 심고 싶다고 했다.

숫자는 오늘날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편리한 분류를 하고, 식별하는 번호가 되고, 평가하는 서열이 되고, 자본의 척도이기도하다. 이렇듯 문명사회에서 없어서 안 될 꼭 필요한 숫자지만 갈수록 그 힘이 거대해져 가끔씩은 주객이 전도되어 인간이 그것의 지배를 받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부친의 해외근무로 초등학교를 외국에서 다니다 귀국했다. 중학교에 다닐 때 가장 충격적인 것 중 하나가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번호로 부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험점수, 반 등수, 전교 등수 등 숫자로 분류되고 서열이 매겨지는 환경이 삶의 구석구석에 자리 잡았다. 그래도 요즘 자라는 아이들에 비하면 당시 내가 직면한 숫자는 적은 편이었다. 오늘 아이들은 나의 세대에 비해 훨씬 더 숫자에 민감하고 영향을 받는다.

학교에서의 석차 외에도, 부모님 연봉, 사는 집 평수, 학원 및 과외비 액수, 고등학교의 대학진학률, 지향하는 대학순위, 희망연봉 등 각자의 가치판단이 제대로 자라잡기도 전에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게임의 법칙’은 정해져 있다. 그 규칙에 따라 소위 ‘성공’하는 짜인 공식에 따라 스스로를 대입시키도록 조장돼 왔다. 그래서 그 작위적 서열 게임에서 우위를 차지하지 않으면 낙오자의 낙인을 쉽게 찍는다.

교육방송에서 방영한 한 심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두 명씩 짝을 지워 ‘가위 바위 보’게임을 하게하고 이긴 사람에게 금화모양 초콜릿을 10개씩을 주었다. 그리고 이긴 아이에게, 진 친구에게 주고 싶은 만큼 금화초콜릿을 나누어 주라고 했더니 한 아이를 제외하고는 놀랍게도 모두 진 아이에게 절반인 다섯 개를 나눠주었다. 어린 아이들은 우리가 살면서 잊어버린 근본을 알고 있는 것이다.

게임은 그저 게임일 뿐 그로 인해 이긴 한 쪽이 모든 것을 쟁취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몸소 실천할 줄 안다. 하지만 이 순수는 오래 버티기 힘들다. 도처에서 학습하고 조장하는 소위 사회적 성공의 게임에서는 숫자의 논리에 따라 서열과 권력과 자본이 쟁취되고, 그것을 남용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스럽고 모범이 되는 표본으로 삼고, 혹시나 그 특권의식을 뺏길 새라 끼리끼리 연합하고 비호하기 바쁘다.

어려서부터 이런 환경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이 숫자의 논리를 스펀지처럼 흡수한다. 그리고 그 게임에서 어떻게든 이겨서 성공을 쟁취하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조련된다. 진 친구에게 금화초콜릿을 나눠주던 본마음과, 물불 안 가리는 서열경쟁에서 나만 성공하면 된다는 논리 사이의 간극에서 아이들 마음은 병들 수밖에 없다.

졸업식 시즌이 되면 학생들의 광적인 일탈행위들이 보도되는 것을 보며, 요즘 젊은 것들이 말세라며 혀를 끌끌 차기에 앞서 우리 사회에서 자라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진정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할 수 있는 풍토인가를 되물어야 한다. 어려서부터 숫자의 논리로 사고하도록 키우는 미래의 희망들 속에 마음의 병과 잠재적 광기를 함께 배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새겨야 한다.

앞서 언급한 지인은 뉴욕을 휩쓸고 간 경제공황에도 여전히 고연봉직을 유지하고 있다. 그가 꿈꾸던 나무 심는 모습은 언제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