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 "삶이 곧 디자인이다"…길 걷는 디자이너
2011-01-19 13:10
그는 1982년 독일 베를린으로 디자인 유학길에 오르면서 세계여행을 시작한다.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을 비롯해 폴란드·체코·헝가리 등의 동유럽을 거쳐 베트남·일본·싱가포르·발리 등에 이르기까지 28년 동안 세계 곳곳을 누볐다. 그 발걸음의 자국이 ‘길 걷는 디자이너’에 오롯이 담겼다.
여행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인생과 예술에 훌륭한 스승으로 작용했단다. 어린 시절 지게여행과 크레파스 소녀가 그의 여행과 디자인의 화신이 듯, 작가는 아비뇽에서 만난 소녀(한국계 혼혈)에게 지게를 직접 만들어 달빛 아래를 거닐었고, 폴란드 단스크에서 만난 장님신부에게 떨리는 마음으로 초상화를 바치기도 했다.
이태리 토스카나 처녀의 품에서 젖먹이 어린아이처럼 잠들기도 하고, 짝사랑에 빠졌던 부다페스트의 집시소녀와 아쉬운 이별을 하고, 일본의 게이샤 사요코와 낭만적인 강가 산책이 이어졌다. 작가의 머리를 하염없이 깎아주려 했던 리아와의 만남 등에 이르기까지, 저마다의 사연과 향기를 지닌 여인들이 책속에서 넘실댄다.
유럽의 샤먼 요셉 보이스, 베를린 유학 시절 학교 수위 아저씨와 자코메티에 얽힌 비화, 같은 대학 작곡과 교수로 있던 윤이상으로부터 (어느 한국학생의 죽음을 애도하는) 비석제작을 의뢰받은 저자가 끝내 늙은 거장의 속삭임에 눈물 흘리고 마는 사연도 담아냈다.
중년을 넘긴 그의 글은 아시아로 옮겨지면서 사뭇 철학적으로 변모한다. 유럽에서의 길이 젊음과 자유의 축복이었고 예술은 축복의 향연이었다면, 아시아의 길은 역사와 문화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며 예술은 그 성찰에 대한 실질적 행동으로 전개된다.
본문에서 ‘조국과 결혼한, 호치민(胡志明)’의 뇌세포를 땅굴줄기로 묘사한 저자의 삽화가 인상적인데, 리콴유의 현대적 국가도시 싱가포르와 비교하며 호치민의 땅굴을 ‘20세기 베트남민족의 최고 건축물’로 평가했다. 글 종반부에선 ‘자유와 꿈’만 있다면 인간은 누구나 여행자나 예술가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작가에게 길과 여인은 축복이고 예술은 축복의 향연이다. 인간에 대한 무한한 관찰과 애정을 지닌 작가는 ‘길 걷는 디자이너’를 통해 결국 ‘인간과 자연 이상의 아름다운 디자인은 없다’는 단순진리를 끌어낸다. 여행의 끝에서, 노교수가 던진 다음의 말은 우리 모두가 음미해봄 직하다.
“디자인이 인생이고 인생은 디자인이다. 디자인이 없는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디자인이 필요 없는 인생이 진정한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