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100년 DNA 8·1] 뿔뿔이 흩어지는 현대왕국

2010-07-23 11:42
1·2차 왕자의 난… 3개 주요 계열사로 분리

외부의 숱한 시련을 이겨냈던 현대그룹도 내부의 분열은 피할 수 없었다. 1997년 외환위기, 1999년 대우 부도 사태…. 1953년 종전 후 고속 성장을 이어 오던 한국 경제는 사상 초유의 위기를 겪는다. 이와 맞물려 83개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1위 ‘현대 왕국’도 그룹 해체 수순을 밟게 된다. 강력한 리더십으로 그룹을 이끌어 오던 ‘왕회장’의 건강 악화가 이를 더 부추겼다.

특히 2000년 8월 정몽구 회장이 자동차 부문 10개 계열사 분리한 것을 시작으로, 그룹은 본격적인 해체 수순을 밟게 된다. 뒤이어 정몽준 회장이 이끌던 현대중공업그룹도 곧 그룹에서 탈퇴했다. 정몽헌 회장이 맡은 기존 현대그룹은 현대상선,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아산 등 중소형 계열사만을 거느린 재계 10위권 밖 그룹사로 전락한다.

특히 이 같은 ‘핵분열’ 과정에서 차남 정몽구 현 현대차그룹 회장과 5남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은 ‘1·2차 왕자의 난’이라는 이름 하에 완전히 갈라섰다. 이 과정에서 현대그룹의 주춧돌을 닦았던 현대건설과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업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는 법정관리에 들어간다.

◆1996년 정몽구 회장 취임… 2세 경영 본격 돌입

정주영의 넷째 동생 정세영은 1987년부터 현대그룹 회장직을 맡게 된다. 정계에 진출한 정주영 창업주와 아직은 경력이 일천한 차남 정몽구를 대신한 징검다리 역할이었다.

정세영은 10년 동안 회장을 맡으며 포니.엑셀을 히트시킨다. ‘포니 정’이라는 별명이 그가 초창기 현대차에 미친 영향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현대차를 제 궤도 위에 올려놓은 후 10년 후인 1996년 조카인 정몽구에 회장직을 물려주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다. 그는 이후 1999년까지 현대차 명예회장을 거쳐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에 오른다.

정세영이 물러난 1996년, 정주영의 차남 정몽구는 그룹 회장에 오르며 처음으로 그룹 전면에 나선다. 정몽구는 첫째 정몽필을 대신해 정씨 일가의 사실상 큰아들 역할을 해 왔다.

그는 1969년 현대그룹에 평사원으로 입사한 이래 1974년 현대자동차서비스 사장에 올랐다. 그는 이후 이 회사의 매출을 매년 두 배씩 끌어올리는 실적으로 대내외에 인정받게 된다.

한편 정몽구 회장이 그룹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1996년은 정주영이 대선 낙선 충격에서 벗어나 대외 활동을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또 1950년 현대건설이 미군 사업을 맡을 때부터 함께 해 온 첫째 동생 정인영이 그룹에서 퇴임하던 시기와도 맞물린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 갈라선 정몽구와 정몽헌

하지만 후계 구도 정립이 순탄치는 않았다.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은 그룹 전체를 형제나 아들들 한 명에게 맡기지 않고 그룹을 분가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게 화근이었다. 1999년 그룹의 후계자는 차남 정몽구 회장이었으나 6남 정몽헌 당시 현대전자 회장도 그룹 회장으로 승격시킨 게 대표적인 예다.

정주영은 일찍이 차남 정몽구에 현대정공, 현대강관, 현대자동차서비스, 현대산업개발, 인천제철 등 자동차·철강 관련 부문을 직접 거느리고, 5남 정몽헌에는 현대전자, 현대상선, 현대엘리베이터를 맡긴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또 3남 정몽근은 금강개발 회장, 6남 정몽준은 현대중공업 고문, 7남 정몽윤은 현대해상화제 사장, 막내 정몽일은 현대종합개발금융 사장직을 유지토록 했다. 그룹을 총 6개 부문으로 분리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계획은 처음부터 틀어졌다. 2000년 3월 이른바 첫번째 ‘왕자의 난’이 벌어진 것이다. 그 달 14일 정몽구 회장은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고려산업개발로 전보시키는 내정 인사를 단행했다.

이 회장은 2003년 현대아산 대북송금 특검 때 정몽헌 회장에 불리한 증언을 해 정 씨 일가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혔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정몽헌 회장의 최측근이었다.

정몽구 회장이 이 회장을 전보시키자 정몽헌 회장은 바로 다음 날인 15일 이를 보류토록 했다. 정몽헌 회장은 이어 24일에는 정몽구 공동회장의 면직을 발표했다. 이로써 두 형제간의 대립이 극에 달했다. 27일 왕회장이 정몽헌 회장의 손을 들어 주며 이번 갈등은 일단락 됐지만 이게 끝은 아니었다.

당시 경제 상황은 그룹 해체를 더 부추겼다. 그 해 5월 현대건설이 유동성 위기로 결국 법정관리에 들어갔으며, 현대전자는 1999년 LG반도체 인수 때 차입한 15조8000억원을 감당하지 못해 2001년 현대건설의 뒤를 따랐다.

정주영 회장은 2000년 5월 31일 정주영·정몽구·정몽헌 등이 경영에선 손을 떼는 ‘3부자 동반 퇴진’을 발표했지만 정몽구 회장은 이를 거부했다. 이 발표가 아버지의 뜻이 아닌 정몽헌 회장의 시나리오라고 봤기 때문이다. 결국 정몽구 회장은 그해 8월 말 자동차 관련 10개 계열사를 거느린 채 현대그룹에서 분리했다.

정주영 창업주가 그해 말 건강 악화로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때고 이듬해인 2001년 3월 세상을 떠난 뒤 두 회장의 갈등은 더욱 가속화 했으며, 정몽준 현대중공업 최대주주도 현대그룹을 떠났다. 이로써 정주영이 일궈 놓은 범(汎) 현대그룹 크게는 6개 그룹사로 분리되며 이 모습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장례식에서의 화해… 아직도 끝나지 않은 갈등

현대가 형제들 사이의 갈등은 2003년 정몽헌 고(故) 현대그룹 회장이 세상을 떠나고서야 일단락 됐다. 정 회장은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대북사업을 계승했다. 주요 계열사를 다 떼고 군소 그룹으로 전락했지만 금강산관광, 개성공단 등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해 왔다. 이는 그의 명예회복을 위한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2003년 대북 사업을 위한 대북 송금 문제가 검찰 조사를 받으며 피의자 신분으로 전락했다. 2000년 왕자의 난으로 인해 주요 측근들을 모두 잃었다. 검찰 조사 중 최측근이었던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의 증언은 그를 더욱 절망감에 빠뜨렸다. 그는 결국 그 해 8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왕자의 난’으로 인해 3년 넘게 단절됐던 형제들도 장례식에서 만큼은 한 자리에 모였다. 특히 직접적인 경영권 다툼으로 관계가 소원해 진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장례 준비를 독려하고 빈소를 지키며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동생과의 앙금을 끝내 풀지 못한 걸 몹시 가슴아파했다고 한다. 그는 경기 하남 선영에서 동생의 무덤 주위를 둘러보다가 “주변이 너무 휑하다. 소나무를 좀 더 옮겨 심어야겠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하기도 했다.

정몽준 의원도 말년에 관계가 틀어졌지만 어린 시절 한 방을 썼던 바로 윗 형인 정몽헌 회장의 죽음으로 망연자실해 했다는 후문이다. 특히 정몽구의 현대차그룹과 정몽준의 현대중공업그룹이 승승장구하는 동안 현대그룹은 대북사업에서 손실을 입은 것은 물론 하루가 멀다하고 사건이 터지며 고전했다는 점이 주위의 안타까움을 더했다.

형제간 갈등은 1차 왕자의 난 이후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진행형이다. 특히 10년째 법정관리 하에 놓였던 현대건설이 매물로 나오며, 정몽헌 사후 그룹 경영권을 계승한 미망인 현정은 현 회장과 정몽준 현대중공업 최대주주, 정상영 KCC 회장 사이의 인수전이 다시 한번 도마 위에 올랐다. 장남 격인 정몽구 회장이 여기에 관여했다는 소문이 돌며 세간의 이목은 여기에 더욱 집중되고 있다.

(아주경제 김형욱·김병용·이정화 기자) nero@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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