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100년 DNA 3-2] 해외에서 길을 찾다

2010-05-28 17:11
현대가 해외로 진출한 세가지 이유

“나는 1960년대 초부터 현대의 전환점을 해외 진출에 걸었다.” 지난 1990년대 초 어느덧 칠순을 바라보던 정주영의 말이다. 현대는 이 기간 동안 1965년 태국 파타니-나타리왓 고속도로 건설을 시작으로 중공업?자동차 등 새로운 사업에서도 성과를 내며 전 세계가 놀랄 만한 성과를 냈다.

◆해외 진출의 세가지 이유=정주영이 해외에 눈을 돌린 이유는 세가지로 요약된다. 먼저 공격적인 경영자 특유의 본능 때문. 기업인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면 그 장소가 국내든 해외든, 혹은 전쟁터든 알래스카든 큰 문제가 아니다. 공격적인 성향의 정주영이 좁은 한반도를 벗어나 해외로 나간 것은 어쩌면 필연이다.

   
 
정주영은 국내 건설 업체로는 최초로 해외 공사에 진출한다. 사진은 1965년 태국의 공사 수주를 위해 비행기에 오르는 모습. (사진=정주영 박물관)
청년 정주영이 농사꾼 집안에서 가출한 것도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마찬가지로 현대가 자동차 수리에서 건설로, 건설에서 조선업, 조선업에서 자동차로 확장해 온 이유도 돈 때문이다.

같은 기간 현대자동차(1967년)와 현대조선소(현대중공업,1972년)는 물론 현대시멘트(1970년), 아세아상선(현대상선, 1976년), 현대종합상사(1976년), 현대정공(현대모비스, 1977년) 등도 설립했다.

정주영은 이 시기에 대해 “나는 항상 긴장 속에서 모험을 감행하면서 일했다. 모험은 거대한 조직에 활력을 넣어주며, 그것이 현대라는 조직을 움직이는 ‘조화의 핵’이 됐다”고 술회했다.

그는 이어 “한 기업인이 악착같이 해외 시장을 개척하고 인재 양성을 해 한국이 이만큼 성장?발전했다는 점에 대한 평가는 인색해선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업에 있어 올바른 이윤 추구는 곧 사회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는 의미다.

시대 또한 정주영 같은 기업가 정신을 요구하고 있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은 쿠데타 이후 경재개발 1~3차 5개년 개획을 차례로 수립하고, 전통적인 농업국가에서 경공업 국가로, 또 중공업 국가로의 변화를 꾀하고 있었다.

1960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에 불과했지만, 1979년의 1인당 소득은 1676달러로 20년 사이에 20배 이상 성장했다. 엄청난 속도였다. 박 전 대통령이 동남아를 돌아보며 부러워한 지 20년도 채 안 돼 신흥 국가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다.

그런 가운데 기업인 정주영의 추진력은 필수불가결했다. 이런 점에서 박 전 대통령과 정주영은 서로 죽이 잘 맞았다. 실제 박 전 대통령은 정부의 주요 사업을 진행할 때마다 그와 상의한 후 정주영에게 일을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경부고속도로나 울산 조선소 등이 대표적인 그들의 합작품이다.

   
 
중동의 공사 현장을 돌아보는 정주영. 작업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일반 노동자와 다름없다. 언제나 땀흘리며 보람을 얻는 노동자라고 여겼던 정주영은 현장 근로자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을 편안하게 여길 정도였다. (사진=정주영 박물관)

◆“제일 무서웠던 건 정변”=
마지막으로 정주영은 정당한 평가를 받고 싶었다. ‘정권과 결탁해 큰 기업인’이라는 오명을 벗고  자력으로 컸다는 평가를 받고 싶어했다. 물론 현대는 박정희 정권에 힘입어 성장한 부분이 없지 않다. 하지만 정권의 부침으로 겪었던 어려움이 더 컸다.

비단 정주영 뿐 아니라 국내 대부분 기업인은 굴곡이 많은 한국 근대사로 인해 숱한 부침을 겪었다. 일제시대에서 첫 사업을 시작한 이래 한국전쟁, 이승만 정권과 4.19 민주화 운동, 두 차례의 군사쿠데타, 1987년 민주항쟁이 대표적인 사회적 변화였다.

이를 통해 그 동안 닦아 놓은 기반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리기도 하고, 정경유착?부정축재자로 몰려 돈과 명예를 모두 잃기도 했다. 1961년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와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설 땐 청와대로 불려나가 곤욕을 치렀다.

전두환 정권 초기에는 숙원 사업이었던 창원중공업을 대우에 넘기는 아픔도 겪었다.

1984년, 정주영은 연세대학교 최고경영자 세미나에서 “현대그룹 경영자로서 현시점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자 한 치 망설임 없이 ‘정변’이라고 답했다. 이는 그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얼마나 큰 고충을 겪었는 지 보여준다. 그가 말년에 정계에 뛰어들게 된 것도 분명 이런 ‘아쉬움’ 때문이었으리라.

그의 노력은 정권의 부침이 줄어든 그의 말년 이후부터 국내외에서 제대로 평가받은 듯 하다.

지난 1999년 홍콩 ‘파이스턴이코노믹리뷰’지는 정주영을 아시아 10대 인물로 선정했다.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한국을 막강한 산업국가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주영 신화’는 한국 근대사회 성립과 거의 동격으로 봐도 무방하다”라는 것이 수상 이유였다.

(아주경제 김형욱?김병용?이정화 기자) nero@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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