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시리즈 16] 왜 3남을 후계자로?
2010-02-19 17:40
1987년 12월 1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호암아트홀은 1500명에 달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날 46세의 젊은 사업가가 국내 최대 그룹의 수장으로 추대되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서다.
2008년 4월 22일 비자금 파문으로 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날 때 까지 20여 년 동안 삼성그룹을 이끈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본격적으로 그룹 경영의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삼성그룹 회장직을 맡으며 이건희는 아버지인 호암 이병철 선대 회장이 이뤄놓은 경영성과 그 이상의 업적을 세웠다. IMF 위기 속에서 한국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한 주역 가운데 하나가 삼성이다. 아울러 삼성은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 오히려 한국 산업이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체질을 갖췄다.
그리고 삼성이 이러한 역할을 하기 까지는 누구보다 이건희의 역할이 컸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삼성이 이러한 역할을 하기 까지는 누구보다 이건희의 역할이 컸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가 회장에 취임하던 당시 오히려 이에 대해 불안한 시선을 보낸 이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선친인 호암은 사업과 관련해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부분을 스스로 관리하고 결정했다. 신라호텔 창립 당시, 객실 구조는 물론 가구부터 문고리 하나하나까지 호암의 결재를 받지 않은 사안이 없을 정도다. 여기에 냉철한 카리스마는 보통 사람들이 함부로 범접할 수 없었다.
이에 반해 46세의 이건희는 아직 많은 것이 부족해 보였다. 어딘가 주눅들어 보이는 표정에 어투도 눌변이었다. 적은 나이는 경륜이 부족하다는 선입견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장자상속 원칙이 남아있는 한국에서 3남이 대그룹을 물려받은 것 역시 정서에 맞지 않았다.
당초 호암은 장남인 이맹희를 그룹 후계자로 점찍어두고 10년 이상 후계자 수업을 해왔다. 반면 이건희에게는 미디어 관련 계열사를 물려주고자 했다. 때문에 이건희의 첫 직장도 동양방송이었다.
하지만 호암은 1977년 3남인 이건희를 후계로 삼겠다고 결정한다. 이후 이건희는 10년 가까이 선친 곁에서 경영수업을 받으며 차기 그룹을 이끌어가기 위한 준비를 거듭한다.
그렇다면 호암은 왜 이건희를 후계자로 선택했을까?
우선 장남인 이맹희가 삼성그룹을 이끌 재목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호암은 자서전인 호암자전을 통해 “장남 맹희에게 그룹 일부 경영을 맡겨보았다. 그러나 6개월도 채 못돼 맡겼던 기업체는 물론,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고 회고했다.
차남인 이창희 역시 복잡한 대조직을 관리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고 판단했다. 이건희에 대해서는 “본인이 희망했다”고 짧게 설명하고 있지만 이것만으로 경영권 승계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다.
이건희가 후계자로 선정된 바탕에는 호암의 사업철학과 인재관을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호암은 ‘실패한 경영인은 범죄자’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기업가가 경영에 실패하면 이는 자신에게만 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종업원들이 생업을 잃게 되고 결국 국가적으로 큰 손실을 입힌다는 것이다.
당시 삼성은 종업원 수가 10만 명에 달하는 대기업이었다. 여기에 협력업체 등 삼성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업체의 종업원, 그리고 이들에게 딸린 식솔들까지 감안하면 삼성이 흔들리면 국가경제 전체가 휘청이게 된다. 때문에 호암은 삼성을 보존하는 것은 단순히 삼성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의 대표적인 경영철학인 ‘사업보국’(事業報國)에서 알 수 있듯 후계자 결정 문제는 단순히 자신의 가족, 기업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인재관과 관련해서는 ‘그릇론’과 관련이 있다. 호암은 각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맞는 그릇이 있다고 판단했다. 중간간부 급의 직책에도 못 미치는 직원이 있는 반면, 기업의 사장까지 충분히 맡을 수 있는 그릇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자신의 아들들에게도 똑같이 적용했다. 그리고 삼성이라는 대그룹을 온전히 품을 수 있는 그릇으로 막내 아들인 이건희가 합당하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호암이 이건희를 삼성그룹의 후계자 감으로 판단한 근거는 무엇일까?
먼저 호암과 이건희는 비슷한 모습이 많다. 호암은 뛰어들 만 하다고 판단되는 사업과 관련해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철저한 정보수집과 연구를 거듭했다. 궁금한 사안이 있으면 관련서적과 미디어를 섭렵했다. 그래도 의문이 안 풀리면 직접 관련 분야 전문가와 만나 의문이 풀릴 때까지 질문했다. 삼성의 대표산업인 반도체 역시 이러한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집념 역시 대단했다. 한번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사업이 있으면 주변의 반대에도 이를 밀고나가는 추진력이 있었다. 그리고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세세한 부분까지 직접 챙기는 주도면밀한 모습을 보였다.
이건희 역시 연구가 취미라 불릴 정도로 관심분야에 대해 끊임없이 파고들었다. 이를 통해 그는 전자제품은 물론 애견·승마·자동차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가 급의 지식을 갖고 있을 정도였다. 익명을 요구한 삼성전자의 사장급 인사는 “이 전 회장은 사내 엔지니어에 버금갈 정도의 전문지식을 갖고 있다”며 “이러한 지식과 더불어 특유의 창조성을 갖고 있어 기술개발에 문제가 있으면 이를 돌파할 방법을 제시할 정도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D램 반도체 기술 방식이 스택방식과 트렌치방식으로 양분됐을 당시 이건희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두루 접하고 스택방식을 삼성전자의 기술방식으로 채택했다. 그리고 이는 삼성전자가 향후 20여 년 동안 D램 1위를 달리는 승부처가 됐다.
일에 대한 고집도 선친인 호암을 넘어설 정도다. 삼성의 첫 반도체 사업 진출도 이건희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반도체 사업의 중요성을 깨닫고 삼성의 반도체 진출을 간하지만 호암은 위험요소가 크다며 이를 뒤로 미뤘다. 이에 이건희는 자신의 힘으로 19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는 집념을 보였다. 그리고 한국반도체는 1978년 삼성반도체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꿨으며 결국 삼성 반도체 산업의 모태가 됐다.
이같은 끊임없는 연구와 집념이 있었기에 호암은 이건희를 후계자로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호암의 결정은 틀리지 않았다. 당시 국내 1위에 머물렀던 삼성은 이건희 취임 이후 ‘제2 창업’을 시작으로 끊임없는 변혁과 성장을 거듭하며 ‘월드베스트’ 기업으로 거듭났다.
아주경제= 특별취재팀 ehn@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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