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동북아 통합 이끄는 운전석 앉아야"
한동안 잠잠했던 동아시아 통합 논의가 다시 탄력을 받고 있다. 1990년대 말 아시아 외환위기를 맞아 통합 논의가 고개를 들었다면 전 세계를 덮친 금융위기는 다시 한번 동아시아 통합의 필요성을 던져주고 있다. 달라진 점이라면 역내 위기 대응체제 구축보다는 동아시아를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 시대'를 열어젖히자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논의의 중심에는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총리의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이 있다. 하토야마의 구상은 공동 통화를 사용하는 유럽연합(EU) 수준의 통합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아주경제신문은 16일 일본의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구체화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 온 이토 켄이치 동아시아공동체평의회 의장 겸 일본국제포럼 이사장을 만나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에 대한 견해를 들어봤다. 인터뷰는 일본 도쿄 나가다초에 있는 일본국제포럼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이토 의장은 "동아시아 공동체가 실현되려면 한국과 중국, 일본 3국이 핵심축인 동북아시아의 통합이 선행돼야 한다"며 "동북아시아의 통합을 선도할 나라는 바로 한국"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이토 의장과 나눈 인터뷰 요지.
-동아시아공동체평의회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면.
"1990년대 후반 아시아 통합 논의가 부상하면서 다양한 민간단체의 창립이 제안됐다. 특히 2001년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ㆍ아세안)과 한ㆍ중ㆍ일 3국 정상이 함께 한 제1회 'ASEAN+3' 정상회의에서 한국의 김대중 전 대통령은 '동아시아 공동체(EAS)'를 주창했다. 이 과정에서 동아시아비전그룹(EAVG)과 동아시아연구그룹(EASG), 동아시아싱크탱크네트워크(NEAT) 등이 설립돼 중장기적인 동아시아 통합 논의가 구체화했다.
이토 켄이치 동아시아공동체평의회 의장 |
동아시아공동체평의회는 2003년 ASEAN+3의 씽크탱크가 결집해 설립된 NEAT의 일원이다. 일본 정재계와 학계 대표 등이 두루 참여하고 있는 평의회는 매년 한 차례 열리는 NEAT 총회에 동아시아 통합과 관련한 일본 각계의 입장을 전달하고 일본 정부에 정책 제안도 하고 있다. NEAT 총회는 각국의 입장을 모아 보고서를 만든 뒤 ASEAN+3 정상회의에 정책 제안의 형태로 보고하고 있다"
-미국에 의존해 온 일본의 외교정책이 아시아를 주목하게 된 배경은.
"일본이 미국 중심 외교를 펼쳐 온 건 자국 방위의 근간이 미ㆍ일 안보조약에 있었기 때문이다. 종전 이후 일본 정치권을 지배해 온 자민당 정권은 이른바 '요시다 독트린' 아래 미국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하는 정책을 펴왔다. 요시다 독트린은 '방위는 미국에 맡기고 일본은 경제 문제에만 전념한다'는 논리다.
그 결과 일본은 반세기만에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지만 아시아를 포함한 국제사회에 공헌한 게 없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이를 의식한 하토야마 정권은 '신일본'을 지향하는 일본이 더 이상 미국의 방위 우산에만 갖혀 있을 수 없다며 동아시아 통합을 공언하고 있다.
일본국제포럼도 일본이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전 세계와 새로운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을 일본 정부에 전달해 왔다. 일본이 전 세계와 새로운 관계를 쌓기 위해서는 아시아와의 화합이 선행돼야 한다. 일본 정부는 특히 아시아가 번영하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외교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
-동아시아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한ㆍ중ㆍ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많은데.
"일본에서도 한국처럼 농업 부문 개방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아 일본 정부는 FTA에 소극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다. 특히 종전 이후 농지개혁을 통해 소작농에서 자작농으로 신분을 바꾸게 된 농민들은 과거 자민당 정권의 든든한 지지기반이었다. 자민당 정권도 농심(農心)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부 보조금에 대한 의존도가 커진 일본 농업은 경쟁력을 잃게 됐다.
평의회는 최근 민주당에 일본 농업의 경쟁력 제고 방안을 담은 정책을 제안했고 민주당은 이를 정책에 반영하기로 했다. 농업 관련 규제를 철폐하고 일본 전역에 경제특구를 조성해 농지 이용을 확대하자는 게 정책 제안의 골자다. 이를 통해 일본 농업에서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는 고품질 농산물을 특화시켜 해외시장 진출에 나서면 농업 부문 개방이 FTA 추진의 큰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FTA는 인력 교류 측면에서도 일본에 득이 될 게 많다. 일본은 간호사와 간병인 등이 매우 부족한 상황이다. 고령인구와 함께 수요는 급증하고 있지만 공급은 턱없이 부족하다. 평의회 정책위원회에서는 한ㆍ중ㆍ일 FTA 협상 추진에 대비해 인력 교류 범위 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동아시아 공동체의 가능성에 대해 한마디 한다면.
"동아시아 화합의 걸림돌 가운데 하나가 서로 다른 정체성이다. 일본만 해도 영주 외국인의 지방 참정권이 보장되지 않는 등 차별이 여전하다. 공동체가 실현되려면 이런 차별은 사라져야 한다.
재일 한국인도 차별받고 있기는 다른 영주 외국인들과 마찬가지다. 달라진 점이라면 과거에는 일본의 영주 외국인이 대개 재일 한국인이었지만 최근에는 중국이나 브라질 등지에 뿌리를 둔 영주 외국인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재일 한국인들은 일본 국적을 취득하는 사례가 늘면서 그 수가 오히려 줄고 있다. 특이할 점은 적잖은 재일 한국인이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정체성은 매우 중요한 문제로 유럽의 통합도 개별 국가의 국민을 자처하던 이들 사이에 '유럽인'이라는 의식이 자리잡으면서 가시화됐다. 하지만 '아시아인'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낯설다. 동아시아 공동체는 '아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확산되는 과정에서 완성될 것이다. 긍정적인 신호는 동아시아 각국 간의 심리적 거리가 조금씩 좁혀지면서 동료의식이 싹트고 있다는 점이다"
아주경제= 김재환 기자 kriki@ajnews.co.kr
◇이토 켄이치 동아시아공동체평의회 의장 약력
△1938년 도쿄 출생
△1959년 외교관상급시험합격
△1960년 히토츠바시대 법학부 졸업, 외무성 입성
△1977년 외무성 퇴직, 이토 켄이치 사무소 개설
△1980년 아오야마대 경영학부 조교수
△1980년 조지타운대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도쿄지부 대표 (~1987년)
△1982년 아오야마대 국제정치경제학부 교수(~2006년)
△1985년 홋카이도대 슬라브연구센터 연구원(~1986년)
△1987년 일본국제포럼 이사장
△1999년 일본분쟁예방센터 이사장(~2004년)
△2004년 동아시아공동체평의회 의장
△2006년 아오야마대 명예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