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로 칼럼) 중직(重職), 그 감당하기 어려운 자리

2009-09-17 16:34


이명박 정부의 후반기의 성패를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내각 개편과 대법관 한 명을 포함한 최고위직 인사가 검증대에 올랐었다.

뜨뜻미지근하던 정국이 정기국회 개원과 동시에 시작된 인사청문회를 기회로 갑자기 달아오르고 있다.

4월 보선이후 어수선한 야당 안 팍 사정과 무기력한 여당이 담합이라도 한 듯이 국민들의 삼복더위에 겹친 청량정치 갈증을 외면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니 생경스럽다.

출범 총리에 여섯 명의 장관. 그리고 대법관이 교체되는 자리는 무겁고도 높은 자리이다.

오죽하면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자리라 하고, 재상이나 공경의 자리라 하지 않던가. 그래서 그들이 앉을 자리를 중직(重職)이라 부른다.

개인과 가문의 영예이며, 출세의 표상이다. 또한 그들이 판단하고, 결재하며, 수행하는 일들은 크게는 나라의 명운을 가르며, 작게는 소박한 시민의 생사를 여탈한다.

잘못된 판단은 돌이킬 수없는 재앙이 되어 대대손손 옹이박이로 남는다. 

이미 인사청문회를 법으로 정해 시행한지 9년에 이른다. 처음 입법취지는 절대 권력으로 독주하는 대통령을 견제하고, 막중한 임무를 수행할 고위직 인물의 자질과 능력을 국민의 권위로 검증하고 흠결을 미리 가려 정정당당하게 임무를 수행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는 자질과 능력 검증이며, 하나는 윤리 도덕과 준법 검증을 하는 것이다. 9년에 이르는 동안 많은 청문회를 지켜보았지만 기실 만족할만한 성과가 쌓였다고 하기에는 모자란다.

오랜 세월 살아온 한 인간이자 공사인의 능력과 자질, 윤리성과 도덕성 그리고 준법 여부까지를 검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능력과 자질은 지명된 인물의 경력을 바탕으로 인사권자가 발탁한 만큼 특별한 정실이나 정략적인 판단이 아니라면 어렵지 않게 드러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역대 인사청문회는 개인의 인격이나 도덕성, 준법 흔적에 치우친 이른바 도덕성 검증이 주류를 차지했고, 늘 지난 다음에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뒷북을 맞는다.

이번에도 전례를 비껴가지는 않을 모양이다. 메뉴판이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재물 따라 학군 따라 위장전입, 편법증여, 병역의혹, 논문의혹에 후원금 의혹이다.

이것이 우리 주류사회의 이력서라면 참으로 서글프지 않을 수 없다.

그들에게도 정의감, 애국심에 불타는 지난 세월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은 주류가 아니었을 것이다. 어느 듯 주류에 같이 흐르며 그렇게 소중했던 가치가 흐려졌을 따름 아니겠는가.

그렇다 하여도 어느 사회에나 금기는 있고, 또 있어야만 한다. 학력과 재력, 그리고 기회는 무작정 평등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균등해야 한다.

더구나 법을 어기며 대물림을 하는 것은 최소한 공직으로부터는 뿌리가 잘려야 한다.

야당은 다소 기울어진 민심을 주워 담을 기회로 삼을 각오로 철저히 살피리라 벼르는 모습이다. 지난 청문회의 ‘낙마의 추억’을 떠올릴 만하다.

하지만 적장을 죽이려 적의 말을 쏘자는 일이 아니기를 바란다. 지금 우리는 전쟁을 치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법관과 법무장관이 비록 작다 하여도 법을 어긴 일이 있다면 덮어주라는 말은 아니다. 언제까지나 낮은 백성들만 법대로 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사소한 문제들을 갖고 흠집 내기로 낙마시켜 대통령을 흠집 내려는 것은 (야당의) 자가당착’이라는 인식수준은 비록 정치적 언사라 할지라도 심히 걱정된다.

법을 어김이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대통령 보다는 국민들 가슴에 나는 흠집을 더 걱정해야 진정 여당이다.

가을하늘은 높아만 가고 더하여 개울물도 날로 푸르러 간다. 참 좋은 철이다. 벼슬이 높아질수록 도덕성과 재물 모으는 것은 매미날개처럼 투명해야 하고, 법을 가을 서리같이 생각해야 한다.

인사청문회를 지켜보는 국민들의 눈빛이 가을 볕살보다 더 따갑다.

박기태(경주대 교수. 정치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