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前대통령서거] 남북화해협력 첫발 불구 못 이룬 '통일의 꿈'

2010-02-17 09:13

"오늘의 북핵문제 해결방안은 북한은 핵을 완전히 포기하고, 미국은 관계정상화를 통해 북한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길뿐입니다. 이 외에 대안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원칙에 합의한 바 있습니다. 2005년 9월 19일 6자회담의 공동성명, 그것을 준수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도 좋고, 일본도 좋고, 중국도 좋고, 러시아도 좋고, 한국도 좋고, 북한도 좋은 것입니다. 다시 9·19 선언으로 돌아갑시다. 그리하여 동북아시아에 평화와 안전, 협력의 시대를 열어갑시다."

18일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달 14일 주한유럽상공회의소 초청연설을 위해 준비했다가 하루를 앞두고 폐렴증세로 입원하는 바람에 발표하지 못한 연설의 제목은 '9·19로 돌아가자'였다.

김 전 대통령의 일생은 통일을 향한 기나긴 여정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신 때부터 '빨갱이'로 몰려 수차례 고초를 겪었지만 3단계 통일론과 대북 포용 정책의 확고한 신념을 꺾지 않고 마침내 남북 화해협력 시대를 여는 등 통일운동에 평생을 투신했다.

남북문제와 인연을 맺은 것은 해방정국 때 몽양 여운형이 좌·우익을 망라해 구성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참여하면서부터. 이후 남로당 간부와의 비밀자금 거래와 관련돼 투옥되기도 했으나 나중에 단순한 대부관계로 드러나 용공혐의가 벗겨지기도 했다. 오히려 6.25전쟁 직후 북한군에 잡혀가 우익반동이라는 이유로 투옥됐다 총살 직전 탈옥하기도 했다.


1954년 정치권에 입문한 그는 1971년 신민당 대선후보로 나서 박정희 대통령과 맞붙어 석패한다. 당시 대선에서 '4대국 한반도 평화보장론'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운 이래 군사정권 30년 동안 줄곧 '빨갱이' 혹은 '용공 정치인'으로 낙인찍혀 왔다.

이후 대선에서 혼쭐이 난 박 정권이 그를 최대 정적으로 지목, 정치적 탄압을 본격화했고, 그 중심에는 바로 용공 시비가 항상 뒤따라 다닌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1972년 신병치료차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 전 대통령은 이듬해 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반체제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한민통)를 결성하는 등 반유신 활동을 전개하다 당시 정권에 납치당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바로 이 한민통 활동이 사회주의에 공조한 것이 아니었느냐는 비판도 그를 좌익으로 몰려는 세력에게는 좋은 소재가 됐다.

그럼에도 그는 레드 콤플렉스가 지배하는 분단 한국의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해 한반도 평화와 남북 화해협력의 첫발을 내딛음으로써 6·15 공동선언을 이끌어내고 냉전의 섬 한반도에 평화의 기운을 불어넣은 '현대 정치사의 거목'이었다.

김 전 대통령의 통일정책은 1970년대 야당지도자 때부터 주장해온 '남북연합→연방제→통일국가'를 골자로 하는 3단계 통일론으로 압축된다.

남북정상회의를 최고 의사결정기구로 하는 남북연합을 첫 단계로, 한반도 평화분위기가 성숙하면 연방제를 만든 뒤 통일국가를 이룬다는 내용이다.

그의 통일론이 빛을 발한 것은 대통령에 취임한 1998년 이후였다. 당선 직후 북한의 도발 불용 등 대북 3원칙을 천명하면서 햇볕정책을 과감하게 실천으로 옮긴 것.

그의 통일정책은 재임기간에도 북한 잠수정 침투와 금강산 관광객 억류, 제1연평해전 등으로 난관에 봉착했지만 대북포용 정책 기조는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2000년 3월 남북간 협력 수준을 민간에서 정부로 진전시키겠다는 베를린 선언을 하고 그해 6월 분단 반세기 만에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으며, 꿈에나 그리던 이산가족상봉과 금강산관광도 실현됐다.

이 공로로 한국인으로선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2000년 노벨평화상을 안긴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노벨위원회의 객관적 평가에 따르면, 그의 치열한 삶은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한반도 평화와 대북 화해협력정책을 상징하는 '햇볕정책'이라는 세 가지 열쇠말로 요약된다.

햇볕정책은 2003년 참여정부 출범 후에도 계승·발전되면서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퇴임 후 제1차 남북정상회담 직전 현대가 4억 달러, 정부가 1억 달러를 북측에 몰래 건넨 사실이 밝혀진 데 이어 2006년 북한의 핵실험이 뒤따르면서 그가 일생을 염원하고 추구했던 햇볕정책과 통일론은 빛이 바랜 채 다시 남은 자들의 몫이 됐다.

아주경제= 서영백 기자 inche@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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