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파란만장의 삶... 민주주의 이룩한 정치거목 '인동초'

2009-08-18 17:14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생은 그야말로 한편의 드라마다.

55년 동안의 정치인생동안 김 전 대통령은 수차례 정권 차원의 핍박과 죽을 고비를 맞았지만 결국 대통령에 당선과 노벨평화상 수상에 이르기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2000년 10월 13일. 전세계 외신들이 올해의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김대중 대통령”을 보도하는 순간, 청와대는 환성과 박수로 뒤덮였다.

끊임없는 시련과 좌절 속에서도 굽히지 않았던 김 전 대통령의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한반도 평화를 향한 노력이 정당하게 보상받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1954년 목포에서 무소속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면서 시작된 김 전 대통령의 정치인생은 그야말로 굴곡의 연속이었다.

김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은 4번의 고배를 마시고 난 뒤인 1961년 인제 보궐선거에서였다.

그러나 그는 당선된 지 사흘만에 5ㆍ16 쿠데타가 터져 의원직을 잃은 데 이어 5ㆍ16 쿠데타 뒤 반혁명사건에 연루돼 투옥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후 1963년 6대 총선에서 목포에서 당선돼 명성을 날리기 시작, 1970년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서 극적으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다.

46세의 나이로 돌풍을 일으키며 박정희 전 대통령과 승부를 벌였으나 부정ㆍ관권선거 속에서 그는 94만표라는 근소한 표차로 패했다.

하지만 이 패배는 이후 20여년간 이어질 시련의 시작에 불과했다. 

그 뒤로도 그는 유신정권에서 전두환 군사정권까지 55차례의 연금생활, 5년반 동안의 감옥생활, 2차례의 망명생활, 5차례의 죽을 고비 등을 겪어야 했다.

 

1971년 테러로 보이는 교통사고로 인해 평생 발을 절게 됐고 1972년에는 유신선포로 일본 망명생활에 들어갔다. 1973년에는 도쿄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돼 현해탄에 수장될 뻔하다가 본인의 뜻과는 관계없이 끌려서 돌아왔다. 이어 끝없는 가택연금 생활이 계속됐다.

그러나 이런 인신구속 상태는 그의 민주화 및 인권운동의 빛을 더해줄 뿐이었다. 1976년에는 '명동 3·1구국선언'으로 구속돼 2년9개월간 복역했다.

1980년 '서울의 봄'으로 사면복권돼 자유를 누린 것도 잠시, 신군부의 쿠데타로 다시 투옥됐고 1981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국제 여론 덕분에 감형돼 목숨을 건진 그는 1982년 석방됐으나 미국으로 두번째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1985년 2월 군사정권의 온갖 위협 속에서 귀국한 그는 곧바로 연행돼 또다시 가택연금에 당했다. 비록 발이 묶인 상태였지만 2·12 총선을 지원해 신민당 돌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뒤 그는 대선 출마를 강행, 야권 분열과 함께 민주진영의 패퇴로 인해 군부통치 종식이라는 국민적 기대를 저버렸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88년 총선 때 재기에 성공한 그는 1992년에 다시 대선에 도전했으나 실패한 후 정계은퇴를 선언한다. 영국으로 건너가 6개월 동안 절치부심의 시간을 보낸 그는 귀국해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한다.

그는 통일연구에 전념하다가 1995년 지방선거를 계기로 정치활동을 재개한 뒤 그해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해 정계복귀를 선언했다. 그리고 1997년 12월 4번째 대선 도전에서 성공함으로써 최초의 여야 정권교체를 이룩한다.

그의 진가는 남북관계에서 나타났다. '햇볕정책'은 반세기 동안 닫혔던 북쪽의 문을 열게하는 열쇠가 됐다. 김 전 대통령은 2000년 6월13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고, 북한이 미국과 적대관계 종식을 선언하게 됐다.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삶을 살았던 그는 지난달 13일 폐렴증세로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아오다 18일 향년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아주경제= 이나연 기자 ny@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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