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기의 수레바퀴] 노조(勞組)에 노(怒)하는 이유
바야흐로 춘투(春鬪)의 계절인데, 몇몇 회사를 뺀 자동차 노조들은 대부분 조용하다. 쌍용차 노조는 회사가 풍전등화의 신세라 제 코가 석자다. GM대우 노조는 공장이 자주 쉬는 터라 별 일 없이 세월을 보내고 있다. 노조가 없는 르노삼성은 이틈을 타 ‘조용히’ 내실을 다지느라 여념이 없다.
이 와중에도 무척 바쁜 곳이 있으니, 현대기아차 노조다. 규모도 큰 데다 일도 많아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에 시전판이 따로 없다. 기아차 노조는 ‘지역별 노조 전환’을 놓고 자기들끼리 갈등을 겪다가 결국 찬반투표를 하고 있다. 현대차 노조는 밥그릇 뺏길까봐 물량 나누기를 하기 싫다는 3공장 사업부 위원회를 설득하느라 체면이 말이 아니다.
하지만 현대기아차 노조는 ‘도박으로 성한 놈 도박으로 망한다’는 만고의 진리를 몸소 증명하느라 더 바쁘다. 올해만 도박사건으로 내홍을 겪는 게 두 번째다. 앞선 도박 사건으로 현대차 아산공장 위원회가 총사퇴를 했다. 그런데 또 다시 기아차 노조원들이 조폭과 연계해 동료들을 상대로 수십억 대 사기도박판을 벌렸다가 덜미를 잡혔다. 충격적인 것은 전현직 노조 간부가 2명이나 포함됐다는 것이다.
한 달에 한번 꼴이니 이 정도면 지역별 노조 전환 투표나 물량 나누기 설득 전에 노조원들을 대상으로 ‘도박과 이별하는 법’을 주제로 강연이라도 먼저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입에 담기 싫은 일들도 서슴없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임단협 파업 당시 수배중인 현대차 노조 간부가 룸살롱에서 술을 마시고 인근 모텔에서 자다가 경찰에 덜미를 잡히는 일도 있었다. 노조의 진정성이 의심되는 일들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번 사태에 대한 노조 집행부 차원의 반성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도박사건에 책임을 지고 아산공장 위원회가 총사퇴를 하긴 했지만, 집행부 누구도 이 일에 책임을 지려하지 않고 있다. 재발방지 대책 역시 없다.
웃자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독재 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70년대를 거쳐 민주화의 꽃이 피기 시작한 90년대까지 도저한 시대의 흐름을 만들어왔던 한국 노동운동이 무너지는 게 안타까워서 하는 이야기다. 속으로부터 곪아 썩어가는 모습에 악취가 날 정도다. 쪽방에 모여 자유를 갈망했던 기억이 없어서 일까? 이 정도면 그냥 놔둬도 제 풀에 지쳐 스러질 것 같다.
지금의 노동운동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것은 ‘맨 처음 씨앗’인 전태일 이후 수많은 선배들의 피와 땀이 기저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목숨을 담보로 철권통치와 싸워 성취한 반석을 그대로 누리는 후배들은 그래서 몸가짐을 조심하고 주위를 살펴야 한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들메끈을 단단히 죄야 하는 때인 것이다. 또 다른 권력이 되 버린 지금 이 모습을 보자고 선배들이 피와 땀을 흘린 게 아니기 때문이다.
김훈기 기자 bom@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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