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수, 돈 안 빌리는 'EBO'가 뜬다

2009-03-15 16:26
금융위기로 '차입매수(LBO)' 매력 떨어져

글로벌 금융위기로 사모펀드의 기업 인수ㆍ합병(M&A) 판세가 바뀌고 있다.

유동성이 풍부했던 과거에는 사모펀드들이 인수 대상 기업의 자산을 담보로 금융기관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해 기업을 인수하는 차입매수(LBOㆍLeveraged Buyout)가 대세를 이뤘다.

하지만 금융위기로 금융권으로부터의 자금조달이 여의치 않게 되자 차입금을 들이지 않고 기업을 인수하는 주식매수(EBOㆍEquity Buyout)가 급부상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최근 보도했다. 경기침체로 크게 떨어진 기업가치도 변화의 배경으로 꼽힌다.

EBO는 사모펀드가 자체 자산을 동원해 기업을 인수하는 방법이다. 금융정보리서치업체인 딜로직에 따르면 사모펀드의 주식 규모는 최근 일년새 62% 줄었다. 그만큼 EBO가 성행했다는 얘기다.

일례로 지난해 10월 미국 사모펀드인 어드벤트인터내셔널(AI)은 엑스페리앙프랑스의 카드 부문을 차입금 없이 현금 2억6000만 달러에 인수했다. 차입에 따른 리스크가 없는 만큼 기업을 내놓은 쪽에서도 인수제안을 반겼다는 게 주변의 평가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불확실성이 큰 시기에 현금만큼 확실한 것도 없다는 얘기다.

세계적인 불황 탓에 매물로 나오는 기업의 가치가 크게 떨어지고 있는 점도 EBO의 성행을 부추기고 있다. 스코트 누텔 콜버그크라비스로버츠(KKR) 공동 창업자는 "최근에는 기업들이 50%나 할인된 가격에 시장에 나와 있어 차입금이 굳이 필요없다"며 "지금이 싼 가격으로 기업을 인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말했다.

자금난을 겪고 있는 기업의 부채를 싸게 사들여 기업을 인수하는 방식도 각광받고 있다. 과거 M&A시장 호황기에 기업의 주식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경쟁적으로 프리미엄을 붙여 줬던 것과는 상전벽해다.

지난 1월 오크트리캐피탈매니지먼트와 어빙플레이스캐피탈매니지먼트는 채권을 매입해 채무 수준을 낮춘다는 조건으로 파산 직전에 있던 포장업체 첼시피크를 4억8500만 달러에 인수했다.

하지만 M&A시장의 미래가 불투명하기 때문에 M&A 전략의 변화는 중요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오히려 더 많은 자기 자본이 필요한 EBO가 LBO보다 위험하다는 경고도 들린다.

알렉 영 S&P이쿼티리서치 주식투자전략가는 "글로벌 경기침체로 세계 경제 전반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게 문제"라며 "기업인수 방식과 무관하게 기업을 인수하려는 움직임도 제한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EBO와 LBO의 접점을 찾으려는 시도도 나타나고 있다. 다만 금융권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아니라 인수 대상 기업의 모기업으로부터 일부 자금을 빌리는 방식이다.

실제로 지난해 12월 영국 사모펀드 BC파트너스는 전압기 생산업체인 SGB그룹을 6억 파운드에 인수하는 과정에서 인수금액의 25%를 SGB의 모기업으로부터 빌려 거래를 성사시켰다. BC파트너스는 신용시장이 회복되면 금융권에서 자금을 빌려 부채를 갚겠다는 전략이다.

신기림 기자 kirimi99@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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