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대한 희망 `검은 케네디'

2008-11-05 13:41


"흑인의 미국도 백인의 미국도 라틴계의 미국도 아시아계의 미국도 없습니다. 오직 미합중국만이 있을 뿐입니다."
케냐 출신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의 혼혈아로 태어나 어린시절 손가락질을 받고 마약에 까지 손을 댔던 열등감에 가득 찼던 소년.

   그러나 `희망'을 가슴에 품고 하버드 법대를 졸업, 지역 활동가와 인권변호사, 주 상원의원, 연방 상원의원을 거쳐, 정치입문 12년만에 미국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른 `대담한 사나이' 버락 오바마.
 솔직함과 진정성으로 대중을 사로잡으며, 미국인들이 가장 갈구하던 화두 `변화'를 내세워 흑색 돌풍을 일으킨 그를 미국인들은 `검은 케네디'라고 부른다.

   미국 제44대 대통령이자, 미 건국 232년만에 첫 흑인 대통령이 된 그의 47년 인생 여정은 굴곡 많은 한편의 인간 승리 드라마였다.

  
◇ 불우한 출생과 성장
오바마는 1961년 8월4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당시 하와이 대학으로 유학온 케냐 출신의 흑인 아버지 버락 오바마와 캔자스 출신의 인류학도였던 백인 어머니 스탠리 앤 던햄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랍어로 `축복받은'이란 의미를 지닌 `버락'이라는 이름을 물려 받았지만, 어린 시절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부모는 오바마가 두살때 이혼했고, 어머니는 그 후 인도네시아 남자와 재혼하면서, 오바마는 유년기 4년을 인도네시아에서 보내게 된다. 어머니의 두번째 결혼이 다시 파경에 이르자 그는 외조부모가 살고 있던 호놀룰루로 돌아와 최고 사립학교인 푸나호우 스쿨에 들어갔다.

   이 때부터 외조부모는 그의 인생에서 부모와 마찬가지 존재가 됐고, 그가 촌분을 아끼던 대선 장정의 와중에도 외조모의 병세가 위중하자 지난달 23일 이틀 일정으로 하와이를 다녀오고, 대선 전날 외할머니의 임종 소식에 슬픔을 감추지 못하며 "우리 집안의 주춧돌이었고, 특별한 성취와 힘, 겸손을 갖춘 여성이었다"는 성명을 발표한 것도 그의 각별한 애틋함을 반영한 것이다.

   흑인 아버지, 인도네시아인 양부, 백인 어머니, 거기에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인도네시아의 생활과 미국이면서도 미국이 아닌 하와이에서의 어린 시절, 다양한 인종과 종교로 얽혀 있던 이부.이복 형제들.

   이 속에서 극심한 정체성 갈등을 겪으면서 마약까지 접하게 됐던 그지만, 이 같은 내적 갈등과 방황이 오히려 훗날 그에게 문화적 이해와 관용의 토양을 만들어준 양분이 됐다는 평가도 있다.

  
◇성숙..`지역 활동가'로의 변신
오바마는 고등학교를 마친 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옥시덴틀 대학에 들어가 반(反) 아파르헤이트(인종차별정책) 집회에 참가하면서 처음으로 정치활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고등학교까지 사용해오던 배리라는 이름 대신 버락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 부터다.

   그는 시야를 넓이기 위해 뉴욕에 있는 콜럼비아 대학으로 편입해 정치학 학사를 받은 뒤 1982년 생부의 사망소식을 듣고 `뿌리를 찾아' 케냐 여행을 단행한다. 그는 훗날 "아버지의 땅에서 나의 미래를 그리게 됐다"고 술회한 바 있다.

   케냐에서 돌아온 오바마는 시카고 흑인거주 지역에서 도시 빈민운동에 투신하면서 대선 과정에서 `갓 뎀 아메리카'라는 발언으로 파문을 불러 일으켰던 제레미아 라이트 목사와 인연을 맺었고, 라이트 목사는 그의 결혼식 주례를 했을 정도로 가까운 정신적 스승이자 영적 지도자였지만 발언 파문이 계속 확산되면서 결국 두 사람은 결별의 길을 걷게 됐다.

   시카고 지역활동가 생활을 통해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는 지역환경 뿐 아니라 국가의 법과 정치체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뒤늦게 하버드 법대 대학원을 진학, 법학박사를 받고 변호사가 됐다.

   하버드 법대 시절에는 법대 학회지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하버드 로 리뷰'의 흑인 최초 편집장이 돼 언론으부터 집중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버드 법대시절 시카고에 있는 법률회사에서 연수를 하면서 부인이 된 미셸 로빈슨을 처음 만나 결혼에 골인했다.

   흑인 소방관 가정에서 태어나 프린스턴 대학과 하버드 법대를 나온 미셸은 이번 대선에서 오바마의 정체성에 회의적 반응을 보였던 흑인표를 결집시키는데 큰 몫을 했다.

   미셸 오바마는 대선 유세 지원을 위해 시카고 대학병원 대외업무 담당 부원장직을 그만 두었다. 슬하에 두 딸 말리아(10)와 사샤(7)를 두고 있다.

  
◇정치 입문 12년..변화와 희망으로 대권을 잡다
하버드 법대를 졸업한 후 풍족한 생활이 보장되는 로펌을 포기한채 시카고로 돌아온 그는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시카고 대학 법대에서 헌법을 가르치며 미래를 차근 차근 준비해 나갔다. 당시 그는 학생들에게 미래의 미국을 얘기하는 독특한 법대 강사로 기억되고 있다.

   1996년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에 본격적인 발을 디딘 그는 2000년 연방하원의원 선거에 낙선하면서 다시 고난의 시절을 보내기도 했지만, 2004년 여름 보스턴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존 케리 민주당 대선 후보 지지연설을 하면서 일약 전국적 정치인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당시 그는 `미국인은 모두 하나'라는 기조 연설을 통해 민주당 대의원은 물론, 전국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으며 스타 정치인이 됐고, 곧 이어 대선과 함께 치러졌던 상원의원 선거에서 70%의 득표율로 미국 역사상 흑인으로는 세번째이자, 현역으로는 유일한 흑인 연방 상원의원이 됐다.

   놀라운 성공이었지만, 그의 꿈을 위한 행진은 멈출 줄을 몰랐다.

   오바마는 한파가 몰아치던 2007년 2월10일 일리노이 스프링필드에 있는 일리노이 주의 옛 주정부 청사 앞 광장에서 "우리 세대가 이제 시대적 소명에 답할 때"라면서 대권도전의 출사표를 던졌다.

   그가 대선 후보 출마를 선언했던 장소는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전(前) 대통령이 지난 1858년 "내부가 갈라진 집은 서있지 못한다"는 명연설로 흑인노예 해방의 정치투쟁을 시작했던 곳이다.

   오바마는 올해 민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바로 이곳에서 러닝메이트인 부통령 후보로 지명한 조지프 바이든 상원의원과 함께 처음으로 합동유세를 벌였다.

   오바마는 올해 1월 처음으로 시작된 대선후보 경선인 아이오와 코커스(당원대회)에서 최대 경쟁자였던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을 꺾고 승기를 잡은 뒤 그 여세를 몰아 슈퍼화요일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지난 6월 3일 몬태나와 사우스 다코타 주를 끝으로 막을 내린 5개월간의 경선레이스에서 승리를 확정 지은뒤 8월 덴버 전대에서 민주당의 첫 흑인 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됐다.

   이어 본선 무대에서 그는 "아직 흑인이 미국 대통령이 되기에는 이르다", "경험 미숙으로 대통령직에는 역부족이다"는 등의 부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존 매케인과 조지 부시 현직 대통령을 한통속으로 묶으면서, `지금 미국에 필요한 것은 변화'라고 외치며 민심을 사로잡았다.

   또 새라 페일린 돌풍에도 끝까지 페이스를 잃지 않으면서 3번의 TV토론에서 완승을 거두고, 전대미문의 경제위기 해결의 적임자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해 결국 대권을 낚아 챘다.

   그의 인생역정, 열등감을 희망으로 바꾸고 목표를 향해 쉼없이 나아가는 그의 열정이 이룬 이번 승리는 오바마 개인의 성공 스토리가 아닌 전세계인의 `희망 이야기'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