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에 등 떠밀려 '생색내기'…실효성 의문

2008-10-22 16:01

22일 국내 주요 시중은행장들이 모여 연봉 삭감 등의 자구책을 실시하겠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했지만 진정성이 결여돼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이번 결의문이 정부의 강압에 못 이겨 울며 겨자먹기로 작성된 데다 안에 담긴 내용도 기존에 개별 은행들이 발표한 자구책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결의문 채택에 따른 실효성을 기대하기 힘들고 오히려 관치금융의 나쁜 선례를 남길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 결의문 뭘 담았나 = 이날 발표된 결의문의 주요 내용은 은행장을 포함한 임원들의 연봉 삭감과 영업비용 절감, 중소기업 대출에 대한 만기 연장, 원가절감 노력을 통한 금리부담 완화 등이다.

이는 대부분의 은행들이 이미 발표한 자구책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전날 이명박 대통령이 "국민 세금으로 혜택을 받고 있는 은행들이 고임금 구조를 유지한 채 정부 지원만 기다리는 것은 옳지 않다"며 은행권의 도적적 해이(모럴 헤저드)를 강하게 질타하자 은행들은 일제히 연봉 삭감 방안을 발표하는 등 전시용 대책을 쏟아냈다.

우리금융지주는 하루 늦은 이날 그룹 및 계열사 임원들의 급여 10% 삭감, 내년 예산 동결, 업무 추진비 20% 축소 등의 대책을 내놨다. 신한은행은 전시용 대책이라는 비판 여론을 의식한 듯 임원 임금 삭감을 포함한 더욱 실효성 있는 방안을 조만간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시장에서는 은행장들의 연봉이 수억원에 이르고 스톡옵션과 성과보수 등을 포함하면 일년에 수십억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는 상황에서 임금을 소폭 삭감하겠다는 것은 지나친 생색내기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은행들은 가계의 이자부담 완화를 위해 주택담보대출 금리를 낮추겠다고 큰소리 쳤지만 이 마저도 실효성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반응이다.

김두경 은행연합회 상무는 "은행채 금리가 오르면서 주택담보대출의 기준금리 역할을 하는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도 함께 인상됐다"며 "금리 인하를 위한 유동성 비율 개선 등을 금융당국에 건의했다"고 말했다.

정부의 제도 개선을 통해 시중금리가 낮아지면 대출금리도 따라서 내려갈 것이라는 논리다.

그러나 은행들은 올 들어 CD금리에 붙는 스프레드(가산금리)를 꾸준히 높여 왔다. 주택대출 금리와 CD금리 간 격차는 지난해 말 1.12%포인트에서 올 1월 1.27%포인트, 3월 1.40%포인트로 확대됐다.

김 상무는 "은행들이 자체적으로 금리를 내릴 수는 없다"며 "원가절감 노력을 통해 금리부담을 완화하겠지만 인하폭이 크지는 않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 억지 춘향식 대책…진정성 없어 = 은행장들은 이날 발표된 결의문에서 "깊은 반성과 함께 책임감을 느끼면서 국민들과 고통을 분담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부에 등 떠밀려 억지로 작성한 결의문에는 진정성이 없었다. 은행장들은 회의에 앞서 오전 7시30분 포토 타임을 가졌지만 정작 결의문 발표 석상에는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회의 중에도 일부 은행장이 과당 경쟁을 자제하자고 언급한 것 외에는 특별한 내용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정부가 지급보증을 하기로 했지만 당장 공적자금이 은행에 투입되는 것은 아니다"며 "은행장의 연봉을 삭감하는 해외 은행들이 늘고 있지만 정부가 직접 나서지는 않는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이날 임승태 금융위원회 사무처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급보증에 따른 은행들의 도덕적 해이(모럴 헤저드)를 막기 위해 경영합리화 계획이 담긴 양해각서(MOU)를 받겠다"며 "임원들의 연봉을 삭감하는 등 충분한 자구노력을 해야 한다"고 은행들을 압박했다.

금융권 일각에서는 이번 금융위기가 대외적 요인으로 초래된 만큼 은행들을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해서는 곤란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유지창 은행연합회장은 이날 회의 후 "정부의 지원방안이 발표된 후 은행 직원들의 고임금 문제가 다시 불거지고 은행이 모럴 헤저드가 만연한 집단으로 여겨지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전했다.

이재호 기자 gggtttppp@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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