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주혜의 C] 'ㅁ에서 ㄷ으로' …장애 예술인, 세상과 소통하다

2024-12-16 00:00
문체부·장애인문화예술원 함께 조성… 개관 전시전 '감각한 차이'
장애·비장애 작가 등 참여… 점자책 펼쳐진 '감각의 벽' 관람객맞이
보청기 쓰는 무용가의 '96BPM'·자폐 스펙트럼 작가의 '맹수' 등 눈길



12일 서울스퀘어에서 개관한 모두미술공간에서는 약 300권의 점자책으로 이뤄진 ‘감각의 벽’이 “점자 속에서 한점이 된다면 무슨 말을 담고 싶으세요?"라고 관람객에 묻는다. [사진=윤주혜 기자]

꽉 닫힌 'ㅁ'의 세상에서 열린 'ㄷ'의 세상으로 향하는 첫걸음이 '모두미술공간'에서 시작된다. ‘ㅁ’에서 선 하나를 지우듯, 예술을 통해 우리 사회 곳곳에 자리한 단단한 벽을 허문다.
 
지난 12일 서울스퀘어에서 문을 연 ‘모두미술공간’은 모두를 위한 공간이다. 이곳에는 문턱이 없다. 모든 시설은 단차 없이 조성됐고, 모든 출입문 역시 자동문이다. 누구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모두미술공관은 ‘모든 사람이 예술의 가치를 담을 수 있는 열린 장소’를 지향한다. 특히, 사각지대 ‘ㅁ’에 갇혀 소외됐던 장애 예술인들에게 이곳은 새로운 희망이다. 가능성을 열고 경계를 허물며, 세상과 소통하는 플랫폼이라고 할 수 있다.

장애 예술인들은 그간 작품을 전시할 공간은 물론이고, 창작 활동을 위한 장소조차 확보하기 어려웠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2021년 장애예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장애 예술인들은 작품발표·전시·공연 등 시설 부족(25%), 연습 및 창작공간 부족(23.9%) 등을 주요 어려움으로 꼽았다.
 
이러한 장벽을 허물고자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 힘을 모아 장애 예술인들을 위한 새로운 공간, 모두미술공간을 개관했다. 2023년 4월에 전시장 조성 및 기본계획을 수립한 후 올해 11월 공사를 완료했다. 총 약 423평(1396㎡) 규모로, 전시장(911㎡)과 커뮤니티 공간(485㎡)으로 구성된다.
 
모두미술공간은 이름처럼 모든 예술인을 위한 열린 장소로 운영되지만, 장애 예술인이나 단체에 우선 대관한다. 또한, 장애 예술인에게는 대관료를 대폭 할인한다.
 
모두미술공간 [사진=윤주혜 기자]
‘감각한’ 차이..."차이의 힘을 예술로 발휘" 
모두미술공간의 개관 전시 ‘감각한 차이’에서 관람객이 가장 먼저 만나는 이미지는 촉각지도(점자지도)다. 관람객들은 이를 손끝으로 느껴볼 수 있다. 비장애인이 점자를 만지더라도 그 내용을 알 수 없듯, 이는 그동안 장애인이 미술전시에서 느꼈던 장벽을 촉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엄정순 예술감독은 오랜 고민 끝에 전시 제목을 결정했다. “이 전시 주인공은 누구인지, 주인공을 맞이할 사람은 누구인지가 전시 제목에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감각한 차이’의 주인공은 참여한 예술가들이다. 그들이 남과 다른 상황에 있는 자신의 신체, 자신의 환경에서 스스로 그 차이를 느끼고, 그 차이의 힘을 예술로 발휘하는 주체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시에는 6명의 작가가 참여한다. 4명의 장애 작가와 2명의 비장애 작가다. 서로 다른 감각을 가진 이들이다. 엄 감독은 전시를 통해 ‘예술은 장애를 무거워하지 않는다’란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장애가 결핍만이 아니라 장애로 인해서 숨겨져 있는 잠재된 예민함이 만들어내는 창조성을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고 싶었다.”
 
전시장에서는 300권의 점자책들이 펼쳐진 ‘감각의 벽’이 관람객들에게 묻는다. “점자 속에서 한 점이 된다면 무슨 말을 담고 싶으세요?”라고. 이 점자책들은 대구점자도서관에서 무료로 제공한 교과서들이다. 책의 각 장은 대다수 사람은 읽지 못하는 언어, 점자로 빼곡히 채워있다.
 
전시장에 설치된 노트북을 이용한 체험은 ‘감각한 차이’를 더 확장한다. 관람객이 희망 등의 단어를 입력하면, 그 단어는 즉시 점자로 변환된다. 글자가 점자로 변환될 때 관람객은 새로운 언어와 감각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볼 수 있다.
 
‘96 BPM’은 원우리 작가와 고아라 무용가가 함께 만든 작품이다. [사진=윤주혜 기자]

몸짓과 호흡의 음악을 느낄 수도 있다. 7분 27초짜리 영상 ‘96 BPM’은 원우리 작가와 고아라 무용가가 함께 만든 작품이다. 보청기를 사용하는 고아라는 호흡과 무용으로 음악을 표현했다. 그의 몸짓이 빨라지거나 느려질 때마다 달라지는 숨소리는 마치 음악 비트 같다. 소리가 아닌 호흡과 움직임으로 빚어낸 이 음악을 통해 관람객은 음악은 단지 귀로 듣는 것뿐 아니라, 몸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고아라의 몸짓과 호흡은 '차이'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창조적 출발점이란 것을 보여준다.
 
감각의 파괴도 체험할 수 있다. 김령문의 'Circle Circle on a Hill'은 석고볼, 시멘트, 목재, 철판, 타일, 슬레이트지붕 등으로 구성된다. 이 작품은 “마음에 드는 하얀 석고볼을 하나 골라 원하는 위치에서 과감하게 굴려보세요”라고 관람객에게 주문한다. 굴린 석고볼이 와장창 깨질 때마다 ‘쾅!’ ‘쾅!’ 소리가 전시장에 울려 퍼진다. 충격음에 감각이 흔들리면서, 동시에 감각의 한계가 깨지는 순간을 느낄 수 있다.  
 
김령문의 'Circle Circle on a Hill' [사진=윤주혜 기자]
약자 지키는 무지갯빛 호랑이…5㎝ 시야로 본 풍경 
 
최병인의 '이 사람을 보라’에는 강순탁 작가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사진=윤주혜 기자]

제2 전시실에는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 보라색 형형색색의 맹수들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무지갯빛 맹수들에는 강순탁 작가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자폐 스펙트럼인 강 작가는 제주도 사단법인 누구나와 작업한다.
 
‘야인시대’, ‘장군의 아들’을 좋아하는 강 작가는 이날 개관식에 중절모를 쓰고 왔다. ‘그림을 그리는 즉시 행복해진다’는 그는 작품 속 호랑이, 사자, 용 등이 약자들을 지켜주는 강하고 다정한 맹수라고 소개한다. 강 작가의 이야기와 작업 과정 등은 6분 9초짜리 영상 ‘이 사람을 보라’를 통해 들을 수 있다.
박찬별 '나, 그리고 백 개의 망원경' [사진=윤주혜 기자]


‘나, 그리고 백개의 망원경’은 박찬별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특별한 시각을 100여 개의 캔버스에 담아낸 작품이다. 박 작가는 5㎝ 시야로 본 먼 풍경을 가장 작은 크기인 0호 캔버스에 담았다. 낮에는 강한 빛 때문에 세상을 보기 힘든 그는 황혼이나 새벽 등 빛이 은은한 시간대의 하늘 풍경을 주로 그렸다. 박 작가는 초등학교 때 시각장애인 예술 커뮤니티 ‘우리들의 눈’에서 미술을 처음 배우고 관심을 가졌다. 이후 미술대학에 진학, 지금은 작가로 활동 중이다.
 
일본 시부야폰트의 서체들도 만날 수 있다. 시부야폰트는 장애인 예술가들과 디자이너와 협업해 글꼴과 패턴을 제작하고, 이를 판매해 장애인 예술가들에게 실질적인 수익 구조를 만들어주는 프로젝트다. 동경 시부야를 중심으로 시작돼 지금은 일본 전역에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구글, 유니클로 등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했다.
 
센터폰트 [사진=윤주혜 기자]

 
‘감각한 차이’에서는 시부야폰트의 협업방식을 빌려와 특별히 기획 제작한 센터폰트도 볼 수 있다. '서울 중구장애인복지관'과 협업한 결과물로 폰트의 이름은 '중심'과 '중구'의 중(中)에서 착안했다. 20여 명의 발달장애인들과 폰트만들기 워크숍을 진행했고, 서체에 가장 적합한 최병철의 글씨체로 한글 서체인 센터폰트를 만들었다. ‘감사합니다’, ‘예술은 장애를 무거워하지 않는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등의 문구가 관람객을 반긴다.
 
용호성 문체부 차관은 이날 “특별한 감각을 보여주는 작품들과 이것을 소개하고 감상하는 사람들 간 연결 고리를 만드는 게 문체부의 역할”이라며 “모 지역에 장애인들을 위한 종합적인 예술센터를 만들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장애를 지닌 작가들이 소비자들과 관객들과 만나는 자리를 계속해서 만들겠다"며 "편안한 예술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정부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사진=윤주혜 기자]
강순탁 작가의 '무지개 늑대' 등. [사진=윤주혜 기자]
 
강순탁 작가의 퍼플 타이거, 그린 타이거, 블루 타이거 [사진=윤주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