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석의 경제 읽어주는 남자] 만성질환이 된 저성장…유럽이 가난해진다.
2024-10-29 06:00
영원한 것은 없는가 보다. 유럽이 가난해지고 있다. 세계 제패의 꿈을 꾸었던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도,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통용되었던 이탈리아도,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건설한 대영제국이었던 영국도 세계 경제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다. 세계 자동차 산업을 장악하고 제조업을 호령했던 독일도 이제 흔들리고 있다.
‘저성장의 늪’에 빠진 유럽
유로존(Euro Zone)이 2023~2024년 극심한 경기 침체를 경험하고 있다. 2년 연속 제로 성장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유럽을 대표하는 독일 경제의 부진은 더 심각하다. 독일은 2023년에도 –0.3%로 역성장했고, 2024년에도 0.0%로 매우 부진할 것으로 전망된다. 2024년을 채 마무리하지 않은 상황인데, 자칫 안 좋게 흘러가면 독일 경제가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하게 되는 꼴이다. 엄청난 오명이 아닐 수 없다.
일시적인 상처가 아니라 만성질환 같은 고질병이 되었다. 유럽 경제가 좋지 않은 것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고 구조적 과제가 되었다. 장기적으로도 유럽이 ‘저성장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IMF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2029년까지 각각 0.74%, 0.70%에 수렴할 것으로 전망한다. 프랑스나 영국과 같은 유럽 주요국들도 2029년 약 1.3% 경제성장률에 수렴할 것으로 보인다. 저성장 고착화라는 험난한 여정에 진입한 것이다.
202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41년 만에 찾아온 인플레이션이 세계 경제에 충격을 주었을 때 가장 취약했던 지역도 유럽이었다. 당시 러시아에 대해 경제 제재를 가하면서 러시아에 대한 천연가스 등 자원의존도가 높았던 유럽은 유독 극도로 에너지 가격이 치솟았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주요국들은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0%를 웃돌았다. 예를 들어 소비자물가 상승률의 정점이 2022년 10월 이탈리아 11.8%, 영국 11.1%, 유로존 10.6%를 기록했다. 2022년 6월 주요국 소비자물가 상승률의 정점이 미국 9.1%, 캐나다 8.1%, 한국 6.3%를 기록한 것과 비교해 더 심각했다.
고물가는 국민을 가난으로 몰았다. 물가 상승률보다 임금 상승률이 낮았기 때문이다. 즉, 실질임금이 감소해 서민의 삶의 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코로나19 이전 상황인 2019년 4분기 당시 실질임금을 100이라고 했을 때 유로존은 2024년 2분기까지도 99.4 수준에 달해 코로나19 이전 수준으로 못 돌아가고 있다. 유럽 주요 강대국인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는 더 심각한 수준의 실질임금 감소를 경험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필수적 지출 항목의 물가 상승은 서민의 부담을 가중시킨다. 겨울철 가스비를 절약하기 위해 추위에 떨어야 하며, 치솟는 식료품 가격에 먹고 싶은 것을 외면해야 했다. 극심한 에너지 위기(Energy Crisis)와 생활비 위기(Cost-of-Living Crisis)를 겪으면서 민생경제가 피폐해졌다. 특히 식료품 가격 상승률은 임금 상승률을 크게 초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9년 4분기~2024년 2분기 동안 임금 상승률 대비 식료품 가격 상승률이 독일 16.4%포인트, 스페인 13.9%포인트, 이탈리아 13.4%포인트, 프랑스 11.7%포인트, 영국 8.9%포인트 등으로 나타나 서민의 생활비 부담이 크게 가중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최근 물가 상승률이 2% 수준으로 떨어지고는 있지만 물가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치솟은 물건 가격에서 또 2%가 오르고 있는 것이니 물가 부담은 해소되었다고 할 수 없다.
2024년 하반기 세계는 피벗의 시대에 진입했다. 피벗(Pivot)은 ‘방향 전환’을 뜻하는 용어다. 기준금리를 인상하는 긴축적 통화정책 기조에서 기준금리를 인하하는 완화적 통화정책 기조로 전환(혹은 그 반대)하는 것을 피벗이라고 한다. 필자는 저서 '피벗의 시대 2025년 경제전망'을 통해 2025년까지 세계 주요국들의 피벗 행보가 진전될 것으로 전망했다.
사실 피벗을 가장 서둘렀던 것도 유럽이다. 미국이 9월에, 한국이 10월에 기준금리를 인하하기 시작했지만 스위스는 3월을 시작으로 이미 세 차례, 스웨덴은 5월을 시작으로 이미 세 차례, 유로존도 6월을 시작으로 이미 세 차례 기준금리 인하를 단행했다. 영국도 8월에 첫 번째 기준금리 인하를 단행했으니 미국보다 피벗이 빨랐다.
유럽 경제가 부실해졌음을 자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고용이다. 그 나라에 실업자가 얼마나 늘었는지도 중요하고, 신규 일자리가 얼마나 늘었는지도 중요하다. 따라서 ‘실업자 1명당 빈 일자리 개수’를 확인해 보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즉 실업자가 많아도 취업할 일자리가 그 이상으로 많다면 큰 문제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의 3대 주요국 고용이 불안해지고 있다. ‘실업자 1명당 빈 일자리 개수’가 영국과 프랑스는 이미 기준선(1개)을 크게 밑돌고 있고, 견실하던 독일마저 2022년 2분기 1.43개에서 2024년 2분기 0.91개로 급감했다. 최근 전기차 캐즘과 폭스바겐 사태 등은 고용시장을 더욱 강하게 냉각시킬 것으로 보인다.
첫째, 에너지 안보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유럽이 인플레이션에 유독 취약했던 배경 중 하나는 에너지 수급 구조다. EU(유럽연합) 가맹국 25.7%의 원유와 38.7%의 천연가스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었다(2020년 기준). 독일은 65.2%, 이탈리아는 43.3%의 천연가스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었다. 2022년 당시 서방의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는 러시아에도 상당한 충격을 안겨주었겠지만 서방 국가들에도 치명적이었다. 한국의 에너지 수급 구조를 돌아보고, 각종 자원이 특정 국가에 편중되게 의존하지 않는 구조를 구축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더욱이 지정학적 긴장감이 고조되고, 세계 각국은 보호무역 조치를 강화하고 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로서는 에너지 안보에 대한 고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둘째, 지각변동에 대응해야 한다. 신흥 강국이 부상하는 지각변동이 일고 있다. 글로벌 노스(Global North) 시대에서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시대로 재편되고 있다. 북반구의 주요 유럽 강국들이 세계를 이끌던 시대가 차츰 지나가고, 남반구의 신흥국들이 헤게모니를 쥐고 일어나는 듯하다. 특히 미래 산업에 요구되는 자원을 무기 삼아 글로벌 공급망을 자국으로 끌어오고 제조기지를 구축하는 행보가 전개되고 있다. 한국은 미국, 중국, 유럽에 의존하는 수출구조를 점검하고, 부상하는 주요 신흥국들을 중심으로 신시장을 개척하는 노력 등을 통해 수출구조를 다변화해야 한다.
셋째, 산업 패러다임 변화에 대응해야 한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유럽이 흔들리게 된 배경에는 신유망 산업으로 전환하는 데 뒤처져서다. 조선, 철강, 가전, 휴대폰, 자동차 등 전 산업에 있어서 세계를 호령하던 국가들이 한때 유럽이었다. 그러나 미국, 일본, 한국, 중국 등에 기술 추격을 당하고, 세계 시장을 점차 빼앗기게 되면서 유럽이 ‘저성장의 늪’에 빠지게 된 것이다. 유럽이 아직도 자동차 강국이다. 그러나 전기차 강국이 아니다. 배터리 강국이 아니다. 자율주행차 강국이 아니다.
김광석 필자 주요 이력
▷한양대 겸임교수 ▷전 삼정KPM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원 ▷전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