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준의 Indonesia Story] 소프트 파워 시대 인도네시아 한국어 열풍 

2024-10-17 16:01

[김형준 강원대 문화인류학과교수]


몇 달 전 인도네시아와 이웃한 동티모르(Timor-Leste)의 한 고등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곳 선생님과 대화하던 중, 학생들의 가장 큰 꿈이 한국에 가서 일하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2002년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한 이후 뚜렷한 경제 성장을 이루지 못한 동티모르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해할 만한 희망이었다.
동티모르에서 만난 한국인을 통해 한국 취업과 관련된 흥미로운 소식을 접했다. 매년 몇 만명의 청년이 한국 취업을 원하지만, 동티모르에 배정된 약 1500명의 산업연수생 쿼터조차 채우지 못할 정도로 소수만이 취업에 성공한다는 것이다. 그 원인으로는 한국어가 지목되었다.
외국인이 한국에서 일할 자격을 얻기 위한 첫 관문은 한국어이다. 고용허가제 틀 속에서 한국어 능력시험(EPS-TOPIK) 통과는 필수 요건으로 자리 잡았는데, 2000년대에 도입된 이 제도의 목적은 외국인 노동자의 한국 적응을 돕고 산업재해로부터 이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일하려는 외국인에게 기본적인 한국어 능력을 요구하는 것은 그리 무리한 일이 아니다. 미국 취업을 원하는 이에게 영어를 배우라고 조언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율적 학습이 아니라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조건은 일종의 취업 장벽으로 여겨질 수 있다. 통계 자료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2023년 자료를 보면, 약 1만3000명의 동티모르 사람이 한국어 시험에 응시해 약 1700명만이 통과했다. 합격률이 15%로, 동티모르 청년들에게 한국어 능력을 선망의 대상으로 만들 만큼 어려운 시험이었다.
동티모르의 이웃인 인도네시아에서는 상이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2023년 약 3만8000명이 한국어 능력시험에 응시해서 2만3000여 명이 합격했다. 이 시험이 치러진 16개 국가 중 미얀마에 이어 둘째로 높은 합격률이었다. 동티모르와 유사한 언어적 배경을 공유함에도, 인도네시아에서 나타난 높은 합격률은 한국어 관련 교육 인프라 차이에서 비롯된 듯하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어 학습 열풍이 이어지고 있다. 제도적으로는 제2외국어 과목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고등학교가 증가했으며, 한국어 강좌를 개설한 대학도 꾸준히 늘어났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사설 학원의 확산이다. 자카르타에만 백여 개의 한국어 학원이 있다는 보도가 있을 정도다. 한류에 빠져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도 있지만, 이보다 더욱 주요한 학습 대상은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에서 일하려는 현지인이다. 매년 수만명에 이르는 이들은 한국어 학원의 든든한 배후로 작용한다. 이로 인해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어 학원은 주요 사업 아이템으로 부상했고, 상당한 규모의 한국어 교습자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어의 높은 인기를 떠올리다 보면, ‘문화제국주의’라는 표현이 생각난다. 이 개념은 학계에서 최근 거의 활용되지 않지만, 2000년대를 전후해서는 자주 이용되었다. 이 용어는 정치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는 국가가 문화적으로도 지배력을 행사해 그 패권을 유지하려는 방식을 설명한다. 탈식민지 시대 이후 강대국이 약소국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는 중요한 수단이라 할 수 있다.
문화제국주의의 하위 영역으로 언어, 특히 영어가 자주 언급된다. 영어의 사회문화적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비영어권 화자에게 언어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불평등한 상황을 영어 제국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불평등을 형성하고 고착화한 데에는 영국문화원, IMF, 세계은행과 같은 기관의 적극적인 영어 확산 정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어 제국주의의 결과, 영어 교육을 매개로 한 대규모 경제적 이익을 영국과 미국 같은 영어권 국가들이 얻어왔다는 주장 역시 제기된다.
세계 여러 곳에서 영어에 대한 선호가 확산하여 있음은 부정될 수 없지만, 이를 영어 제국주의의 결과로 설명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계속되어왔다. 무엇보다, 영어에 대한 선호가 개인의 필요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입장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영어에 대한 선호가 개인적 선택의 결과일 뿐, 제국주의가 내포하는 강제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언어 제국주의 논쟁을 인도네시아에서의 한국어 위상에 대입해 볼 수 있다. 한국어에 대한 수요와 한국어 교육 기관의 확대는 한국에서 일하려는 현지인의 필요에 기인한 것이다. 한류에 대한 열광이 한국어에 관한 관심으로 이어지는 현상 역시 한국 정부나 관련 단체의 한국어 확산 정책의 결과로 보기는 어렵다.
이처럼 인도네시아에서의 한국어 열풍을 언어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설명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와 유사한 욕망이 표출된 사례가 있었다. 약 10년 전, 우리 사회의 큰 관심을 받았으며, 이후 초중등 교과서에도 자주 등장했던 한글 수출이 그것이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인도네시아 술라웨시(Sulawesi)섬 변방에 거주하는 찌아찌아(Cia-Cia)족이 있었고, 그들은 자신의 언어를 표기하는 수단으로 한글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이 사건은 훈민정음학회 임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찌아찌아어가 한국어 발음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그들은 현지어를 한글로 표기하자는 제안을 던졌다. 찌아찌아족이 속한 지방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자 한글 수출의 길이 열렸다. 마을 표지판에 한글을 병기하는 작업이 진행되었고, 초등학교 수업에 한글 교육이 추가되었다. 비록 한글 표기 작업이 더이상 진척되지 않았지만, 이 소식은 국내에 알려져 큰 화제를 모았다. 찌아찌아의 한글 도입이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받는 것으로 해석됨에 따라, 우리의 문화적 자긍심을 높이는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찌아찌아의 한글 도입은 그들의 거주지뿐만 아니라 인근 도시 바우바우(Bau-Bau)에도 큰 혜택을 가져왔다. 한국인의 방문이 이어졌고, 여러 한국 단체와 기업, 중앙정부 및 지자체가 다양한 지원을 약속했다. 인도네시아 변방에 있던 바우바우시는 한국과의 문화 교류 중심지로 떠올랐다. 당시 방문했던 바우바우시의 중고등학교에는 한국에서 지원받은 전자제품이 창고 가득 쌓여 있었고, 학생들은 한국과의 교류를 기대하며 한국어를 배우고 있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찌아찌아의 한글 도입은 명확한 실체가 없는 하나의 해프닝 정도라 평가될 수 있다. 우리를 흥분시켰던 한글 도입은 지속되지 않았고, 지방 정부와 체결한 양해각서도 유야무야한 약속으로 남았다. 찌아찌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시간이 지나며 점차 사라졌고, 한국의 지원이 축소됨에 따라 현지인들도 이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인도네시아의 상황을 고려하면, 한글 수출은 애초에 해프닝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식으로 보자면, 찌아찌아의 한글 도입은 한국의 지자체가 한글 외에 영어를 공식 표기 수단으로 사용하겠다는 정책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언어 정책이 중앙정부의 권한이고, 국민 정서상 외국어 병기가 받아들여질 수 없음은 인도네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찌아찌아의 적극적 태도는 바우바우 시장의 정치적 필요에 기인한 것으로, 지방 정부 조례와 같은 법적·제도적 뒷받침이 없이 진행된 일회성 정책에 불과했다.
찌아찌아로의 한글 수출은 우리의 집단적 기억에서 잊혀졌지만, 이 사건이 우리의 언어 제국주의적 욕망을 드러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있다. 제국주의의 희생자였던 우리에게, 언어를 통한 제국주의적 팽창은 꿈꾸어볼 만한 희망이었고, 이는 찌아찌아로의 한글 수출의 의미를 객관적이고 균형 있게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찌아찌아의 한글 도입과 비교할 때, 인도네시아의 한국어 열풍은 성격이 다르다. 무엇보다 그것은 한국어를 배워야 할 필요성을 느낀 현지인에 의해 주도된 것으로, 외부의 강제와는 무관하다. 한국에서 혹은 인도네시아 내의 한국 기업에서 일하기 위해, 한류 콘텐츠를 한국어로 즐기기 위해, 한국인과 교류하기 위해 한국어를 배우려는 인도네시아인이 증가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어에 대한 수요도 확대된 것이다.
최근 국제 관계를 설명하면서 자주 쓰는 표현은 ‘소프트 파워’(soft power), 즉 강제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상대방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이다. 대중문화를 넘어서서 한국어와 한글이 소프트 파워의 한 축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문화제국주의적 정책이 아닌 현지에서 자발적으로 생겨난 한국에 관한 관심과 필요가 핵심적이다. 다시 말해, 우리 경제가 더욱 발전하고, 우리 정치가 더욱 민주화되고, 우리 사회가 더욱 다원화되고, 우리 문화가 더욱 창의적으로 발현될 때, 한국어를 포함한 우리 문화의 세계적 확산은 가속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인도네시아, 나아가 동남아시아에서 K-문학 확산의 디딤돌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