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신드롬] 국제무대서 K-문학 존재감 각인…'한강 바람' 타고 전 세계로

2024-10-14 00:00
한국 문학의 새 지평
"한국어로 된 책 읽으며 자랐다"…창작에 미친 영향 강조
고형렬 시인 "세계 언어권으로 한글 들어간건 기적…우리 모두의 영광"

2016년 5월 한국 작가 최초로 세계 3대 문학상인 '맨부커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이 서울 마포구 서교동 한 카페에서 열린 신작 소설 '흰'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한국 문학과 함께 자랐다.”
 
한국을 포함해 아시아 여성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한강은 지난 10일(현지시간) 노벨위원회와 전화로 인터뷰하면서 이처럼 말했다. 그는 “나는 어릴 때부터 번역서뿐만 아니라 한국어로 된 책들을 읽으며 자랐다”며 한국 문학과 한국어가 그의 창작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강은 역사를 새로 쓸 때마다 한국 문학을 향한 깊은 애정을 표했다.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 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도 “저는 한국 문학 속에서 자라나고 있다”면서 한국 문학이 세계로 퍼져나갈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을 내비친 바 있다.

이번 깜짝 낭보는 K-문학이 세계로 뻗어 나가는 중요 전환점이 될 것이란 관측이 이어진다. 그동안 주변부에 머물렀던 한국 문학의 존재를 중심 무대에 강하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란 전망이다.
"유일하게 풍족했던 건 책”
1970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난 한강은 '10원짜리 종이 건반을 가지고 피아노를 연주'해야 할 정도로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나 소설가인 아버지 덕분에 책으로 둘러싸인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산문집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에서 “어렸을 때 내가 살던 집에서 유일하게 풍족했던 것은 책들이었다”며 집 안에 널린 책들을 마음껏 읽곤 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기도 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등 저자인 아버지 한승원은 집 안 곳곳에 책을 무심히 쌓아두곤 했다고 한다. 한강은 과거 한 인터뷰에서 아버지의 이런 책을 다루는 습관 덕분에 자연스럽게 책을 가까이하게 됐다고 말한 바 있다.
 
한승원은 2016년 딸이 맨부커상을 수상했을 때 이를 아내의 공으로 돌리기도 했다. 당시 그는 "아내는 작가의 가난한 삶을 잘 알고 있었지만, 자식들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가르쳤다. 오늘날 딸의 영광은 모두 현명한 아내 덕분"이라고 말했다.
 
한강은 만 23세에 시인이, 24세에 소설가가 됐다. 1993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후 잡지 샘터에서 근무하면서 습작을 썼고, 그해 계간지인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시가 당선돼 시인으로 등단했다. 이듬해에는 서울신문에 단편 붉은닻을 출품하며 소설가로서 첫걸음을 내디뎠다. 첫 소설집인 ‘여수의 사랑’을 낸 후 전업 작가의 길을 걸으며 문학사에서 새로운 기록을 써 내려갔다. 2016년 맨부커상, 2023년 메디치 외국문학상,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 등 그의 앞에는 항상 ‘한국 최초’란 수식어가 붙었다.
 
특히 그는 5·18 광주민주화 운동, 제주 4·3사건 등 한국 근현대사 비극의 상처를 소설로 형상화했다. 한강은 과거 한 인터뷰에서 11살이었던 1980년 광주 현장에 있지는 않았으나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던 이야기가 그의 삶과 문학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소년이 온다’로 이탈리아 말라파르테 문학상을 받았을 때 “존엄과 폭력이 공존하는 모든 장소, 모든 시대가 광주가 될 수 있다”고 소감을 말했다.
 
한강의 아버지인 소설가 한승원은 지난 11일 집필실인 전남 장흥군 안양면 '해산 토굴' 정자에서 기자들과 만나 소회를 밝힌 뒤 한강(왼쪽 둘째)의 성장기 시절이 담긴 가족사진을 공개했다. [사진=연합뉴스]
거센 ‘한강 바람’···K-문학 세계로 번지나
문학계에서는 한강이 몰고 온 '순풍'을 타고 K-문학이 세계로 뻗어나가게 될 것이란 기대가 나온다. 
 
창비 편집부 부장을 지낸 고형렬 시인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결정은 한국 문학과 한국어, 우리 모두가 받는 위대한 상이자 쾌거”라며 “지극한 슬픔의 강물에 닿은 그의 언어의 희망은 세계에 번진 K-문학의 놀라운 메시지”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국 문학이) 3세계 주변부가 아니라 중심권에 들어가고 있다. 상상도 못할 일”이라며 “세계 언어권으로 한글이 들어갔다는 게 기적이다. 우리 모두가 받는 영광”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고형렬 시인은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이 30년 전부터 문학의 종말이 오고 있다고 했는데, (노벨상 수상은)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켰다”며 “우리 문학에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본다. 우리 국민은 물론이고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놀랄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출판 경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외신들은 K-문학이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는 순간이라고 평가했다. 로이터통신은 “스웨덴 한림원이 10일 (노벨상 수상) 발표 전까지 채식주의자는 한국에서 100만부도 채 팔리지 않았다. 이는 주로 한국의 낮은 독서율 등 때문”이라며 일본이나 중국 대비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한국 문학이 새로운 생명력을 얻을 것이란 낙관이 일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 11일 광화문광장 책마당 행사장에서 관계자가 노벨문학상 한강의 소설책을 비치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주영한국문화원이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며 지난 11일 영국 런던 포일스 채링크로스 본점 언어 부문에 ‘한강 특별 코너’를 설치했다.주영한국문화원은 이곳에서 31일까지 ‘한국 문화의 달’을 개최한다. [사진=주영한국문화원]
지난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의 저서가 소진됐다는 안내문이 설치돼 있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