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SR 잔혹사(feat. 남 탓 하는 항우)
2024-09-02 07:00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못한 죄가 아니다." 진나라 패망 이후 유방과 패권을 놓고 싸웠던 항우는 마지막 전투에서 이렇게 외치고 자결했다. 이를 두고 사마천은 '사기'에서 '자신의 전공만 자랑해 온 항우가 하늘 탓을 한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며 다소 직설적으로 비판한다.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긴 하지만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차지한 유방은 겸손한 사람으로 후세에 기억된다. 유방이 전략을 짜는 데는 장량만 못하고, 전투에 나서는 데는 한신만 못했다고 부하들에게 공을 돌리는 일화는 유방 승리의 원동력으로 평가 받고 있다.
2000년도 훨씬 지난 초나라와 한나라 전쟁 얘기를 꺼낸 것은, 리더나 정부의 가장 큰 덕목은 '남 탓 안 하기' 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다. 최근 가계부채 증가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는데, 정책 담당자들이 책임 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 역시 항우의 실패를 떠올리게 했다.
논란의 시초는 두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내 금융산업 정책을 총괄하는 '금융위원회'가 스트레스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즉 기존 DSR을 더 엄격하게 적용하는 기준 적용을 7월에서 9월로 두 달 연기하겠다고 기습 발표하면서다.
스트레스 DSR 도입이 연기된 7, 8월 가계대출은 두 달 새 최소 13조 이상 불어난 것으로 추산된다. 7월 한 달 동안은 7조5000억원, 8월 22일까지는 6조1000억원이 불어났다. 7월은 월간기준 역대 최대이고, 8월 역시 이 기록을 깰 것으로 보인다. 규제가 심해지기 전에 대출을 서둘러 받자는 이른바 막차 수요가 한꺼번에 몰린 탓이다.
심지어 금융당국의 스트레스 DSR 연기는 '부동산 부양책을 지속하겠다'는 정부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는, 그럴듯한 해석도 시장에 확대됐다. 그 때문인지 주택담보대출을 받아 서울에 집을 산 사람들도 4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할 전망이다. 7월 서울 아파트 매매 건수는 8000건을 훌쩍 넘어선 상태다.
이럴 경우 당국은 오판과 정책 실패에 대해 사과하고 수습책을 마련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둬야 한다. 하지만 최근 당국의 움직임은 이와 거리가 멀었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최근 TV 대담회에 나와 은행들이 대출금리를 올려 이자장사를 하고 있다고 직격했다. 금융당국이 대출관리를 하라고 했지 언제 금리를 올리라고 했냐는 설명도 뒤따랐다. 최근 은행들이 대출 억제를 목적으로 가산금리를 올린 것을 비판한 것이다. 가산금리를 올리면 은행의 이자 마진이 늘기 때문에, 은행을 비판할 때 나오는 단골 레퍼토리 중 하나이다. '이자 장사'를 싫어하는 국민들의 민감한 감수성을 건드리는 발언이기도 하다. 정책 실패에 대한 진지한 반성보다는 은행들이 잘못했다는 남 탓 발언이다.
은행들이 불필요하게 이자를 높여 배를 불렸다면 그 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지난 두 달간 은행의 대출금리 인상은, 대출 수요를 억제하기 위한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더구나 대출 수요가 폭증한 배경에는 당국의 스트레스 DSR 연기가 있었음을 부인하기도 어렵다. 정책 입안자들이 은행을 비판하기 전에 통렬한 당국의 정책 실패에 대한 반성을 했어야 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당국의 불호령에 은행들은 다시 대출 규제책을 내놓고 있다. 서민대출이라며 건드리지 않았던 전세자금 대출을 옥죄고 있으며, 주담대 한도도 대폭 축소했다. 이렇다 보니 실수요자 중심의 서민들이 대출을 못 받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도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정부 정책이 늘상 옳은 효과를 내기는 어렵다. 예상치 못한 변수에 생각지 못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럴 때 정부의 올바른 대처는 잘못된 정책에 대한 반성과 추가 대책 마련이다. 정책 대상에 대한 비판은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나는 잘했지만 너희가 못했어'라는 태도는 리더나 정부의 자세가 아니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함을 인정하고 장량, 한신과 같은 뛰어난 부하들에게 공을 돌린 유방이 결국 천하의 주인이 된 것을 정책 담당자들이 다시금 인지하기 바란다.